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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선의 각도 : 벽과의 거리를 재는 눈

역설의 깊이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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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들은 머리 위에 얹힌 블루의 채도나 가슴 위에 걸친 자주빛 옷자락의 소란스러움을 시선이라 부른다. 화려함은 대개 눈을 가리는 가장 친절한 커튼이어서, 세상은 원색의 착란에 취해 본질을 잊곤 한다. 그러나 나의 시선은 타인이 입혀놓은 색채의 가장자리에서 슬그머니 빠져나와, 언제나 묵묵히 버티고 서 있는 차가운 콘크리트 벽면으로 향한다.


귀에 작고 하얀 음향의 단절기를 꽂는 것은 소리를 들시 않기 위함이 아니다. 세상이 뿜어내는 가벼운 소음들을 경계로 밀어내고, 오직 내 안의 명암이 벽과 맞닿을 때 발생하는 서늘한 진동에 집중하기 위함이다.

벽을 바라보는 일은 결코 수동적인 도피가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내 눈이 내딛는 가장 날카로운 측정이다.


모서리에 서서 눈을 가만히 가다듬으면 세상의 무기력한 빛깔들은 흩어지고, 비로소 벽의 단단한 요철과 질감이 드러난다. 얼마나 많은 고독이 저 벽면에 이마를 대고 지나갔을까. 시선의 각도를 삐딱하게 틀어 벽과의 거리를 재는 순간, 나를 둘러싼 무지개표 거짓들은 잿빛의 단단한 사각형 내부로 여과되어 들어온다.


피부로 먼저 감지되는 벽의 온도는 늘 서늘하다. 그 서늘함이야말로 나를 온전히 깨어있게 하는 유일한 감각의 기둥이다. 고개를 돌려 벽의 평면을 따라 시선을 밀어 넣을 때, 눈은 빼앗긴 원색 대신 세상의 정결한 뼈대를 읽어낸다.


돌아설 필요는 없다. 세상이 다채로운 거짓으로 번잡해질수록, 나는 더욱 단단히 귀를 막고 이 벽과의 거리를 유지할 것이다. 머리 위에는 파란 문장을 얹고, 가슴에는 붉은 그늘을 걸친 채, 시선만큼은 오롯이 흑백의 외곽선에 물리적인 정직함으로 밀착시키는 것.


벽과 나의 눈 사이에 놓인 이 수밀리미터의 고요한 공간. 거기가 바로 내 문장이 시작되고, 모든 착란이 사그라드는 가장 깊은 삶의 코너다.


벽과의 거리를 재는 일을 멈추지 않는 한, 나를 둘러싼 세계의 높낮이는 결코 나를 압도하지 못한다.

세상은 끊임없이 더 많은 색을 칠하라고, 더 밝은 조명 아래로 나와 너의 빛깔을 증명하라고 종용하지만, 무선 이어폰 너머로 흐르는 나만의 고요 속에서 나는 조용히 고개를 저어 보인다. 시안 블루의 쨍함도, 자주빛 착장의 묵직함도 실상은 태양이 잠시 빌려준 가벼운 파장에 불과하다. 빛이 거두어지는 순간 그 모든 색채의 유혹은 순식간에 휘발하여 하나의 잿빛 그늘로 귀결될 것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의 표면을 지탱하는 가장 정직한 단위인 ‘벽’에 내 시선의 뼛조각을 고정한다.

차갑게 건조된 콘크리트의 표면에는 유행에 휩쓸리지 않는 선문답 같은 요철들이 새겨져 있다. 눈으로 그 요철의 굴곡을 하나씩 짚어 내려갈 때, 귀를 막은 정적은 공기 중으로 나이테를 그리며 겹겹이 두꺼워진다. 그것은 세상의 온갖 소란으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는 장치이자, 오롯이 나라는 존재의 명도를 측정하는 가장 서늘한 계측기다.


타인들은 모서리를 만나면 저만치 돌아설 궁리를 하지만, 나는 그 모서리가 주는 서늘한 각도에 슬며시 이마를 대어본다. 모서리는 길이 막힌 곳이 아니라, 시선이 비로소 제 깊이를 깨닫는 반환점이다. 그곳에서 색채의 환영을 벗어던지고 나면, 나라는 존재 역시 하나의 단단한 음영이 되어 벽의 일부로 정결하게 스며든다.


빛이 남긴 모든 착란이 잘려 나간 이 수밀리미터의 간극. 귀에서는 오직 침묵의 주파수가 흐르고, 눈은 세상에서 가장 정직한 흑백의 외곽선을 고요히 그린다.


다음 걸음을 내딛기 전, 나는 한 번 더 벽과의 거리를 재어본다. 어둠은 나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비로소 세상을 통째로 안아 올릴 수 있도록 내 안쪽에서 길게 펼쳐지는 또 하나의 그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면서.


마침내 몸과 시선을 벽에 기대어 본다.

벽에 기대어 서는 행위는 의지할 곳을 찾아 쓰러지는 약함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을 향해 곤두세웠던 헛된 긴장을 내려놓고, 세상의 가장 단단한 뼈대에 나를 맞닿게 하는 숭고한 결단이다. 단단한 벽면에 등을 기대어 비로소 깨닫는다. 내가 지탱해 온 것은 세상을 채운 화려한 색채들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던 이 서늘하고 고요한 질감이었다는 것을.

빛의 소란함에 눈이 멀어 있을 때 세상을 방황하던 시선은, 이제 벽의 요철에 깊숙이 기대어 숨을 고른다.

머리 위에 얹힌 시안 블루의 파란 문장도, 가슴을 감싼 자주빛 그늘도, 그 차가운 콘크리트 벽에 기대어 서는 순간 온전히 하나의 담백한 명암으로 재편된다. 타인의 눈빛을 의식하며 서 있던 불안한 모서리에서 벗어나, 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흑백의 외곽선에 온몸을 기대어 본다.


귀를 막은 작고 하얀 장치 너머로 흐르는 침묵에 기대어 걸어가는 길.

그 길 끝에서 세상은 더 이상 나에게 무지갯빛 환영을 강요하지 않는다. 스스로 하나의 정결한 그늘이 되어 벽에 기대어 서 있는 이 순간, 나는 빛이 만든 모든 착란을 뒤로하고 세상의 가장 깊고 솔직한 뼈대와 마주한다.


가장 솔직하다고 말하는 현실이 펼쳐진 세계.

사람과 사람 사이

건물의 벽과 벽사이를 재는 시선의 각도의 한계를 시험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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