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이 나에게 건넨 거룩한 자유
바람이 창문틀을 가만히 두드리고 지나갈 때 모든 것을 간지럽히게 내버려 두는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의 첫 글자를 잊는다. 세상이 거두어 간 질문들, 하루 동안 빽빽하게 적혀 있던 타인들의 눈빛이 썰물처럼 빠져나간 밤의 해안선을 지나갈 준비를 하며 잠시 눈을 감는다.
어둠은 침묵보다 깊은 옷을 입고 찾아와 식어 가는 찻잔의 수면에 나직한 그늘 하나를 올려놓는다. 누군가의 목소리에 불려 나가지 않는 마음이란 얼마나 투명하고 서늘한 호수인가.
길 가던 그림자도 제 갈 길을 찾아 돌아가고 세상의 모든 이정표가 잠드는 이 시각, 비어 있는 의자만이 나를 응대한다. 응답할 필요가 없는 호흡, 증명할 필요가 없는 존재의 입자들. 마침내 아무도 나를 찾지 않을 때 나는 나라는 문장을 다 읽는다. 누군가의 부름으로 빛나던 달빛이 아니라, 스스로의 깊이로 어두워질 줄 아는 고요하고 완전한 어둠이 된다.
호수 밑바닥에 오랫동안 잠겨 있던 돌멩이가
비로소 제 무게대로 숨을 쉬듯,
부러진 시간의 마디마다
어제의 소음들이 차분히 침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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