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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내가 지나간 자리를 모른다

존재했으나 기록되지 않은 것들에 대하여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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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세상은 내가 지나간 자리를 모른다.

세상은 나에게 별 관심이 없다. 나는 그것이 마음에 들고 편하다.

이 큰 덩어리에서 내가 기억되거나 남아 있는 곳은 없다.

무언가를 기록하지 않는 이상은 아무도 존재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는 세상에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점이 제법 괜찮은 세상의 장점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내가 어느 모퉁이에서 걸음을 늦추었는지, 누구의 뒷모습을 오래 바라보았는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실은 무엇을 견디고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 내가 지나간 거리에는 여전히 자동차가 달리고, 신호등은 정해진 시간에 색을 바꾸며, 사람들은 저마다의 목적지를 향해 걸어간다. 내가 사라졌다는 사실조차 알아차리지 못한 채 세상은 다음 순간으로 넘어간다. 마치 내가 한 번도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는 듯이.


나는 오래전부터 이 사실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이상하게도 내가 지나간 자리에 무언가 남아 있기를 바랐다. 반드시 누군가의 기억일 필요는 없었다. 내가 앉았던 의자가 조금 더 따뜻하다거나, 문을 닫고 나간 방에 미세한 공기의 흔들림이 남아 있다거나, 내가 건넨 말 한마디가 상대의 하루를 아주 조금 다른 방향으로 기울게 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존재한다는 것은 어쩌면 그런 일이었다. 세상을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내가 다녀간 뒤의 세상이 오기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으리라는 믿음. 나는 그 믿음에 기대어 수많은 날을 살아왔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알게 되었다. 내가 남겼다고 생각한 것들 가운데 상당수는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내가 누군가에게 건넨 위로는 그 사람의 기억 속에서 다른 사람의 말과 섞였고, 내가 온 마음을 다해 사랑했던 순간은 상대에게는 오래된 계절의 한 장면으로 남았다. 내가 몇 번이고 되새긴 대화는 상대에게 이미 잊힌 지 오래였으며, 나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긴 사람은 내가 아직도 그날의 문장들을 기억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것이었다. 우리는 같은 시간을 살았다고 믿지만, 실제로는 서로 다른 시간을 통과한다. 한 사람에게 생애를 바꾼 사건이 다른 사람에게는 점심 식사 전후에 있었던 사소한 일로 남기도 한다.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는 한때 기억이란 함께 나눈 시간의 공평한 결과라고 생각했다. 함께 웃었으므로 함께 기억하고, 함께 아파했으므로 같은 깊이의 흔적을 간직하리라 믿었다. 그러나 기억은 공평하지 않았다. 기억은 저마다의 몸속에서 다른 온도로 식었고, 어떤 장면은 사소한 냄새 하나에 되살아나는 반면 어떤 약속은 수십 년이 지나도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날이었던 시간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기억할 가치조차 없는 오후일 수 있었다. 우리가 공유했다고 믿었던 과거는 사실 각자의 내면에서 따로 살아가는 두 개의 생이었다.


그렇다면 내가 지나간 자리를 기억해 주는 사람이 없을 때, 내가 존재했다는 사실은 어디에 남는 것일까.

나는 그 질문을 품고 도시를 걸었다.


도시는 언제나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도착하지 않은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 카페 창가에서 식어가는 커피를 앞에 둔 사람,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면서도 건너편에서 오는 누군가를 찾는 사람. 그들은 모두 어딘가를 향하고 있었지만, 그중 누구도 자신의 삶이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는지 정확히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목적지가 있기 때문에 걷는 것이 아니라, 멈추어 서 있는 동안 자신이 어디에도 도착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까 봐 걷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 역시 그들 사이에 섞여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거리를 걸을 때면 나는 때때로 내가 사람들 사이를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시야에서 조금씩 지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누구도 나를 밀어내지 않았고, 누구도 나에게 길을 비키라고 말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은 내가 있는 곳을 자연스럽게 비켜 갔다가, 지나친 뒤에는 내가 거기에 있었다는 사실을 잊었다. 그것은 불친절보다 훨씬 조용한 일이었다. 세상은 나를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나를 필요로 하지 않았을 뿐이다.


한동안 나는 그 차이를 견디기 어려워했다.

사람은 자신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보다,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 상황에서 더 깊은 고독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누군가 나를 미워한다면 적어도 나는 그 사람의 감정 안에 존재하는 셈이었다. 누군가 나를 기억한다면, 비록 잘못된 모습일지라도 나는 그 사람의 과거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무관심에는 반박할 대상조차 없었다. 나를 지우려는 사람이 없으므로 나를 지우는 일에 저항할 수도 없었다. 내가 사라지는 동안 세상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다.


나는 그제야 깨달았다. 내가 두려워한 것은 죽음만이 아니었다. 살아 있는 동안에도 아무런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다는 사실, 수많은 사람과 시간을 나누고도 그 누구의 세계에도 결정적인 변화가 되지 못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내 삶이 끝나는 날보다 내 삶이 아무에게도 닿지 못한 채 흘러가는 날들이 더 두려웠다.


하지만 정말 그랬을까.

내가 누군가의 삶에 흔적을 남겼는지 확인할 수 없다고 해서, 그 흔적이 없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나는 오랫동안 남겨진 흔적을 눈에 보이는 것으로만 생각했다. 이름이 기억되는 일, 사진이 보관되는 일, 누군가가 세월이 흐른 뒤에도 나를 언급하는 일. 그런 것들만이 존재의 증거라고 여겼다. 그래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시간은 실패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돌려받지 못한 사랑은 낭비였고, 알아주지 않은 친절은 허공에 버려진 것이었으며,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한 인내는 일어나지 않은 일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느 날, 아주 사소한 일 앞에서 그 생각이 흔들렸다.

오래전 내가 자주 드나들던 작은 가게가 있었다. 나는 그곳에서 몇 번인가 커피를 마셨고, 비가 오는 날에는 입구에 서서 우산을 접었다. 주인은 내 이름을 물어본 적이 없었고, 나 역시 그의 이름을 알지 못했다. 우리는 필요한 말만 주고받았다. 커피 한 잔, 영수증 한 장,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인사. 어느 날부터인가 나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생활의 방향이 조금 바뀌었고, 익숙한 길 대신 다른 길을 선택했을 뿐이었다.


몇 달 뒤 우연히 그 앞을 지나갔을 때, 가게는 문을 닫은 상태였다. 유리문에는 임대 안내문이 붙어 있었고, 안쪽에는 비어 있는 의자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그 의자들을 바라보며 나는 내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들을 떠올렸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던 오후, 커피가 식는 줄도 모르고 생각에 잠겼던 순간, 문을 열고 들어오는 사람 때문에 잠시 흔들리던 빛. 그 모든 것이 아무런 기록도 남기지 않은 채 사라져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그곳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내가 그곳에서 보낸 시간은 없어지지 않았다. 그 시간은 누군가에게 증명받을 필요도, 다른 사람의 기억 속에 보관될 필요도 없이 내 삶의 일부로 남아 있었다. 가게가 문을 닫았다고 해서 내가 마셨던 커피가 없었던 일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주인이 내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고 해서 그곳에 앉아 있던 내가 허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세상에서 사라지는 것과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던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나는 그 차이를 오래 바라보았다.

어쩌면 삶은 흔적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 흔적이 남지 않더라도 실제로 지나가는 일인지도 몰랐다. 누군가의 기억에 오래 머무르는 것만이 존재의 완성은 아니었다. 내가 건넨 친절이 어디로 흘러갔는지 알 수 없어도, 그 순간 나는 실제로 친절한 사람이었다. 내가 사랑한 사람이 나를 잊었더라도, 사랑하던 동안의 나는 거짓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내 슬픔을 알아주지 않았더라도, 그 슬픔은 내 안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다. 인정받지 못한 감정이 가짜가 되는 것은 아니며, 기억되지 않는 삶이 실패한 생애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가.

나는 여전히 그 질문에 답할 수 없다. 다만 예전처럼 쉽게 대답하지는 않게 되었다. 한때 나는 사람의 가치를 그가 세상에 남긴 흔적의 크기로 가늠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그를 기억하는지, 얼마나 오랫동안 그의 이름이 불리는지, 그가 떠난 뒤 얼마나 큰 빈자리가 생기는지를 생각했다. 그러나 이제는 빈자리가 크다는 것이 반드시 사랑의 깊이를 증명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안다. 어떤 사람은 떠난 뒤에도 오랫동안 이야기되지만, 어떤 사람은 한 번도 이름이 불리지 않은 채 다른 사람의 삶을 조용히 지탱한다. 세상이 기록하는 것과 실제로 일어난 일 사이에는 언제나 측정할 수 없는 간격이 있다.


누군가의 하루를 망치지 않기 위해 삼킨 말이 있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주워 든 쓰레기가 있을 것이고, 자신의 피로를 숨긴 채 다른 사람에게 건넨 따뜻한 식사가 있을 것이다. 상처받았으면서도 더 큰 상처를 돌려주지 않으려 애쓴 밤이 있을 것이며,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자기 몫의 일을 해낸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런 일들은 기록되지 않는다. 기념비가 세워지지도 않고, 이름이 불리지도 않는다. 세상은 그것들을 지나쳐 다음 날로 향한다.


그러나 그 순간들까지 없었던 일로 만들 수는 없다.

우리가 서로에게 남기는 가장 깊은 흔적은 때로 흔적의 형태를 갖추지 않는다. 한 사람이 건넨 친절을 받은 사람이 훗날 다른 누군가에게 조금 덜 잔인해질 수도 있다. 오래전 자신을 기다려 준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면서도, 정작 자신은 다른 사람을 조금 더 오래 기다리는 사람이 될 수도 있다. 누군가에게서 배운 다정함은 그 사람의 이름을 잃어버린 뒤에도 남아 있을 수 있다. 출처를 알 수 없는 온기가 한 사람의 태도가 되고, 그 태도가 다시 다른 사람의 하루를 바꾼다.


그렇게 세상은 기억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서로에게 이어져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제 내가 지나간 자리를 돌아보는 일을 조금씩 그만두고 있다. 내가 걸어온 길에 무엇이 남았는지 확인하려고 자꾸 뒤를 돌아보면, 정작 지금 내 앞에 놓인 풍경을 놓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가 사랑했던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내가 떠난 곳에서 누군가 내 부재를 느끼는지, 내가 했던 말이 아직 누군가의 마음속에 남아 있는지. 그런 질문들은 여전히 가끔 나를 찾아오지만, 이제는 그 질문들에 반드시 답을 구하지 않는다.


기억은 다른 사람의 권리이고, 망각 또한 다른 사람의 삶에 속한 일이다. 내가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그 사람의 기억을 붙잡을 수는 없다. 내가 지나간 자리를 오래 바라보게 만드는 것은 어쩌면 그곳에 남겨둔 무언가를 찾으려는 마음보다, 그곳에서의 내가 헛된 사람이 아니었다는 확인을 받고 싶은 마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삶은 매 순간 증명서를 발급해 주지 않는다. 어떤 시간은 끝내 설명되지 않은 채 지나가고, 어떤 마음은 누구에게도 정확히 전달되지 않으며, 어떤 작별은 상대가 알아차리기도 전에 완성된다.


그럼에도 우리는 살아간다.

아침이면 문을 열고, 거리를 건너고, 누군가와 인사를 나눈다. 전날의 슬픔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어도 옷을 입고 밖으로 나간다. 어제와 같은 길을 걷지만 어제와 똑같은 사람은 아니다. 아무도 그 변화를 알아차리지 못하더라도, 우리는 우리 안에서 조금씩 달라지고 있다. 세상은 그 미세한 변화를 기록하지 않지만, 기록되지 않는다고 해서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늘도 나는 길을 걷는다.

신호등이 바뀌기를 기다렸다가 사람들 사이에 섞여 도로를 건넌다. 옆을 지나가는 사람의 얼굴을 잠깐 바라보고, 멀리서 다가오는 자동차의 색을 알아차린다. 어느 가게의 유리창에 비친 내 모습을 발견하고도 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이 걸음이 무엇을 향하는지 분명하게 말할 수는 없다. 다만 내가 걷고 있다는 사실만은 안다. 발이 지면에 닿고, 몸이 앞으로 움직이며, 뒤편의 풍경이 조금씩 멀어진다.


그냥 웃어보는 날도 있다. 작은 상황, 이상한 생각과 공상에 이 세상을 걸으며 실없이 웃어 보는 날도 있다.

세상이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과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은 서로를 부정하지 않는다. 아무도 나의 오늘을 기록하지 않아도 오늘은 실제로 지나갈 것이다. 내가 떠난 뒤 아무도 그 자리를 돌아보지 않아도, 그곳에서 내가 바라본 하늘과 들었던 소리와 마음속으로 삼켰던 말들은 내 생애의 일부로 남을 것이다. 누구도 읽지 않은 편지가 쓰였다는 사실이 사라지지 않듯이,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삶 역시 살아졌다는 사실만으로 부정할 수 없는 무게를 갖는다.


나는 이제 세상에 나를 남기겠다는 생각보다, 내가 지나가는 동안 무엇을 훼손하지 않을 것인가를 더 오래 생각한다. 누구의 마음을 함부로 밟고 지나가지 않을 것인지, 내 안의 상처를 이유로 다른 사람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지는 않을 것인지, 내가 받은 무관심을 또 다른 사람에게 돌려주지는 않을 것인지. 내가 남길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쩌면 이름이나 업적보다 이런 작은 선택들에 가까울 것이다.


세상은 내가 지나간 자리를 모른다.

그러나 나는 안다. 내가 어느 날 얼마나 오래 아팠는지, 누구를 사랑하기 위해 어떤 마음을 포기했는지,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얼마나 자주 무너졌다가 다시 일어섰는지. 내가 끝내 말하지 못한 것들과 끝내 놓아주지 못했던 것들, 그리고 언젠가 더는 붙잡을 필요가 없게 된 것들까지. 그 모든 시간은 누구의 증언도 없이 내 안에서 한 생애를 이루었다.


그러므로 나는 더 이상 세상에 나를 기억해 달라고 요구하지 않으려 한다. 기억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내가 살아온 시간을 의심하지도 않으려 한다. 내가 지나온 자리에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생각되는 날에도, 그 자리를 지나던 동안의 나는 분명히 존재했으므로.


언젠가 내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를 알았던 사람들마저 더는 나를 떠올리지 않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내가 걸었던 길은 다른 사람들의 발걸음으로 채워지고, 내가 앉았던 의자에는 낯선 사람이 앉을 것이다. 내가 바라보았던 창밖의 풍경은 바뀌고, 내가 사랑했던 계절은 아무런 예고 없이 다시 찾아올 것이다. 세상은 내가 살았던 날과 내가 살지 못한 날을 구별하지 않은 채 계속될 것이다.


그때에도 세상은 아무 잘못이 없을 것이다.

세상은 누구의 것도 아니며, 누구의 부재를 바카라임져야 할 의무도 없으므로.

다만 나는 내가 살아 있는 동안만큼은 알고 싶다. 기억되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사랑을 아끼지 않는 것, 사라질 수 있다는 이유로 아름다움을 외면하지 않는 것, 아무도 알아주지 않을 수 있다는 이유로 선의를 포기하지 않는 것. 어쩌면 삶이란 영원히 남을 무언가를 만드는 일이 아니라, 언젠가 사라질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함부로 대하지 않는 태도를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다시 걸음을 옮긴다.

뒤에서는 자동차가 지나가고, 앞에서는 누군가가 웃고 있으며, 신호등은 이미 다른 색으로 바뀌어 있다. 내가 지나온 자리에는 아무런 표시도 없다. 내가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해 줄 사람도, 그 순간을 보관해 둘 기록도 없다.


그런데도 나는 이상하게 가벼워진다.

더 이상 세상에 나의 흔적을 남겨야 한다는 의무를 짊어지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나는 오늘을 살아낼 수 있다. 내 이름이 불리지 않는 곳에서도 누군가를 아낄 수 있고,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날에도 내가 느낀 것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다.


나는 세상이 나를 기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조금 더 선명하게 느낀다.


세상은 내가 지나간 자리를 모른다. 그러나 내가 지나왔다는 사실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그 사실을 믿으며 오늘도 앞으로 걸어간다. 뒤돌아보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길을, 그럼에도 한 번뿐인 내 생애의 길이라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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