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각의 제국을 살아가다
추상이 삶을 구원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사랑'이라는 포괄적인 낱말은 슬픔을 일시적으로 유예할 뿐, 새벽 세 시의 뼈마디를 관통하는 차가움까지 데워주지는 못한다. 영원, 구원, 침묵 같은 단어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들은 삶의 거칠고 뾰족한 모서리를 둥글게 깎아내는 유용한 도구일지는 몰라도, 닿았을 때 미열을 남기는 실체는 아니다. 진정으로 삶을 감당하게 만드는 것은 언제나 가장 작고 미세한 것들, 즉 손가락 끝에 맺히는 아주 구체적인 온도뿐이다.
어느 추운 겨울날, 병상의 할머니가 내 내민 손을 꼭 쥐었을 때를 기억한다. 주름진 피부 아래로 느껴지던 미약하지만 분명했던 36.5도의 온기. 세상의 모든 거창한 위로와 사상은 그 한 뼘의 피부가 전달하는 밀도 앞에서 순식간에 무력해졌다. 생명은 이념이나 사상에 거주하지 않는다. 그것은 오직 타인의 피부와 나의 피부가 맞닿는, 그 아주 좁고도 선명한 접점 위에만 겨우 둥지를 튼다.
나는 세계를 지각하기 위해 너무 많은 눈을 사용하고, 너무 적은 손가락을 사용한다. 시각은 나를 관조자로 만들지만, 촉각은 나를 당사자로 만든다. 눈으로 보는 풍경은 언제나 건너편에 존재하지만, 손가락 끝에 닿는 온도는 나를 그 순간의 한복판으로 사정없이 끌어당긴다.
갓 구워낸 빵을 갈라낼 때 손가락 마디에 번지는 묵직한 열기, 오래된 서적의 바스락거리는 종이를 넘길 때 느껴지는 서늘한 먼지의 촉감, 그리고 울고 있는 사람의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었을 때 손바닥을 통해 전해오는 타인의 떨림. 그 구체적인 온도들은 관념의 스펙트럼 뒤에 숨어 있던 세계를 비로소 '현실'이라는 영토로 불러들인다.
생각해보면 내 삶을 지탱해 온 것은 대단한 철학이나 문장이 아니었다. 그것은 찻잔을 감싸 쥐었을 때 도자기 표면에서 퍼져 나오던 따스함이었고, 여름밤 차가운 강물에 손을 담갔을 때 찌릿하게 전율하던 피부의 기억이었다. 손가락 끝은 감각의 변방이 아니라, 내 존재가 세계와 대화를 나누는 가장 최전선의 입술이다.
어디에도 속하지 않고 스쳐 지나가는 삶이라 할지라도, 손가락 끝에 남은 온도는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스쳐 간 바람은 손에 잡히지 않지만, 바람이 지나며 스킨 위에 남긴 서늘함은 흉터처럼 명확한 흔적을 남기기 때문이다.
체온을 잃어가는 것들은 모두 추상으로 돌아간다. 굳어버린 물감, 식어버린 문장, 잊혀진 이름들. 그렇기에 나는 오늘 밤도 거창한 진리를 탐구하는 대신, 가만히 손을 뻗어 내 곁의 구체성을 만져본다. 바카라상의 서늘한 나무 결, 창문에 서린 얇은 김의 온기, 그리고 내 자신의 숨결이 손가락 사이에 남기는 희미한 습기.
모든 빛이 사라지고 언어가 제 기능을 잃어버리는 순간이 올 때, 마침내 나를 지켜줄 단 하나의 기억은 이것일 테다. 내가 이 세계를 만졌다는 사실, 그리고 그 손가락 끝에 더없이 선명하고 구체적인 온도가 맺혀 있었다는 그 아득하고도 단단한 감각 말이다.
나는 가끔 내 손가락 마디마디에 각인된 미세한 지문들을 물끄러미 들여다본다. 그 작고 둥근 나이테 속에는 내가 평생 동안 만져온 세계의 피부들이 소리 없이 겹쳐 있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쥐었던 순간, 내가 손뼉을 쳐서 부서뜨렸던 침묵, 그리고 끝내 움켜쥐지 못하고 손가락 사이로 흘려보냈던 모래 알갱이들. 손가락 끝에 남는 온도는 언제나 단방향이 아니다. 내가 대상을 만지는 동시에, 대상 역시 나를 만지고 지나간다. 촉각은 내가 세상에 남기는 가장 다정하고도 집요한 흉터이자, 세상이 내 몸 위에 남기는 가장 정직한 서명이다.
그러므로 내가 누군가를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에 관한 화려한 각주나 수식어를 수집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손이 머물렀던 서늘한 그늘을 내 손끝으로 가만히 짚어보는 일, 그가 견뎌온 계절의 온도를 내 체온으로 함께 나누어 짊어지는 일이다.
손가락 끝의 온도를 자각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관념의 망명자에서 현실의 주민으로 돌아온다.
나를 괴롭히던 아득한 불안과 수많은 언어의 소음들은 손가락 끝이 짚어내는 선명한 실체 앞에서 이내 힘을 잃는다. 흙을 만질 때의 서늘함, 빗방울이 손등에 떨어져 부서질 때의 아찔한 감각, 그리고 내 이마를 짚어보는 내 손바닥의 나지막한 온기.
이 구체적인 체온들이 모여 나라는 유일한 지도를 그려낸다. 그 지도 위에는 거창한 국경선도, 사상도 없다. 오직 내가 만졌고, 나를 데웠으며, 내가 마침내 감당해 낸 순간들의 작고 선명한 점들만이 반짝이고 있을 뿐이다.
언젠가 내 손 끝에서도 온기가 다 빠져나가고, 내가 쌓아 올린 모든 문장과 기억이 다시 차가운 추상의 세계로 돌아갈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그 마지막 순간이 오더라도 나는 두려워하지 않으려 한다. 손가락 끝에 맺혔던 그 수많은 온기들이 이미 내 영혼의 깊은 골짜기를 데우고 지나갔음을 알기 때문이다.
나는 세계를 머리로 삼키지 않았다.
나는 손가락 끝으로,
이 작고 뜨거운 피부로,
온 세계를 있는 그대로 건너왔다.
세계는 언어가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이미 완성되어 있었다.
혀끝에 닿는 소금의 입자,
겨드랑이 사이로 스치는 서늘한 새벽 바람,
그리고 타인의 눈동자 속에서 찰나로 붕괴하는 작은 빛들.
사람은 그것들을 설명하기 위해 단어를 만들었으나,
단어가 가리키는 곳마다 감각의 왕국은 영토를 줄여갔다.
나는 이름을 잃어버린 사물들의 이름을 다시 지어주지 않기로 했다.
대신 그것들이 내 피부 위에 남기는 입체적인 음영을 읽는다.
사과를 씹을 때 잇몸에 번지는 과즙의 사납고도 달콤한 침입,
오래된 기와지붕 위로 떨어진 빗방울이
이끼의 몸을 타고 내려갈 때 나는 아주 낮고 둔탁한 소리.
세계는 거대한 서사가 아니라,
이토록 뾰족하고 미세한 촉각들의 연대기다.
나의 제국에는 왕관도, 율법도, 영토의 경계도 없다.
오직 감각하는 자와 감각당하는 것 사이의
투명하고 지독한 밀착만이 존재한다.
눈을 감으면 사물들은 비로소 각자의 체온을 드러낸다.
차가운 도자기 잔은 자신의 태생이었던 흙의 기억을 손바닥에 건네고,
바스락거리는 오래된 종이는
자신을 스쳐 지나간 바람의 문맥을 손가락 끝으로 고스란히 전해온다.
보이지 않는 것을 만지려 할 때
손끝은 세상에서 가장 섬세한 눈이 된다.
이곳에서는 슬픔조차 관념이 아니다.
슬픔은 목구멍을 관통하는 서늘한 쇳빛의 무게이며,
기쁨은 뼈마디 사이에 차오르는 가벼운 미열이다.
체온을 가지지 않은 진리는
내 제국의 단 한 뼘의 흙도 차지하지 못한다.
모든 감각은 찰나에 태어나 찰나에 멸망한다.
그러나 그 순식간의 소멸이야말로 감각이 가진 가장 아름다운 자신이 유일하게 가질 수 있는 권력이다.
축적되지 않기에 매 순간이 원초적이고, 소유할 수 없기에 끝내 자유롭다.
모든 빛이 사라지고
언어의 무덤 위로 침묵이 성벽처럼 쌓일 때,
나는 가만히 내 이마에 손을 얹는다.
손바닥을 타고 흘러드는 36.5도의 나지막한 고동.
그것은 내가 이 아득한 세계를
온몸으로 견뎌내고 있다는,
이 감각의 제국이 여전히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가장 조용하고 단단한 선언이다.
내가 숨을 쉬고 살아가고 있는, 계속해서 바뀌어 가는 세상 속에서
유일하게 정복을 허락하지 않을 것이 있다면,
이 '감각의 제국'에 살아가며 유일하게 할 수 있는 것은 '나'다운 것을 해내는 일이다.
Madonna - Human Nature (2022 Remas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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