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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을 지우다

지워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되는 것들

by구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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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사람이 자리하여 식사를 한지 모르게,

처음 그대로 흔적을 지우고 세팅을 한다.

새롭게 보이도록,

어떠한 온기도 없는 곳으로,

새롭게 단장된 모습이 되도록.,

처음 앉게 되는 자리처럼 만드는 일.

그 반복이 나에게는 일상 속에 자리한다.


살다 보면 누구나 무언가를 지우고 싶어지는 순간을 만난다. 빛바랜 서랍 구석에 묵혀둔 옛 편지, 다투고 난 뒤의 서먹한 공기, 혹은 지나온 시간 속에 흩뿌려둔 무모했던 내 모습의 조각들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과거를 발견할 때마다 커다란 지우개를 들고 삶의 페이지를 쓱싹쓱싹 문지르고 싶어 한다.


하지만 흔적을 지우는 일은 생각만큼 가볍지 않다. 종이 위에 꾹꾹 눌러쓴 연필 자국을 지우려 애쓰다 보면, 글씨는 희미해질지언정 종이가 얇아지거나 끝내 찢어져 버리곤 한다. 지우개 가루를 털어낸 자리에는 여전히 눌린 자국이 흉터처럼 남아 그곳에 무언가가 존재했음을 또렷이 증언한다. 기억과 감정의 흔적 역시 마찬가지다. 잊으려고 몸부림치고 억지로 눌러둘수록, 지우려 했던 그 행동 자체가 또 하나의 짙은 흔적이 되어 마음에 남는다.


시간이 흐르며 깨닫게 되는 것은, 진정으로 흔적을 지우는 법은 그 존재를 부정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물 위에 그려진 그림이 파도 한 번에 자연스레 흩어지듯, 억지로 움켜쥔 손을 풀어놓을 때 흔적은 비로소 제 자리를 찾아 희미해진다. 굳이 애써 지우지 않아도 새로운 계절이 오면 묵은 눈이 녹아내리고, 그 위로 푸른 싹이 피어나듯 말이다.


지워지지 않는 과거의 흔적들은 나를 괴롭히기 위해 남아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것은 내가 그만큼 뜨겁게 사랑했고, 치열하게 고민했으며, 때로는 서툴게나마 삶을 살아냈다는 솔직한 기록이다.


굳이 커다란 지우개를 들고 마음의 여백을 더럽힐 필요는 없다. 흘러간 것은 흘러간 대로 두고, 눌린 자국마저 내 삶의 결로 인정해 주는 것. 그것이야말로 지난날의 흔적에 매이지 않고 앞으로 걸어 나가는 가장 아름다운 ‘지움’의 방식일 것이다.


창가로 다가서서 유리창에 희미하게 맺힌 김을 손가락으로 문질러 지워본다. 손끝이 지나간 자리에 잠시 차가운 풍경이 투명하게 드러나지만, 이내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사이 새로운 온기가 스며들며 다시 뿌옇게 흐려진다. 테이블에 작게 묻어 있는 것도 용납하지 않는다. 시간을 지우고 사람을 지운다.


지우려 애쓰는 삶의 자국들도 어쩌면 이 유리창의 김과 같은 것 아닐까.

지워냈다고 믿는 순간에도 우리가 숨을 쉬고 살아가는 한, 새로운 감정과 기억은 계속해서 마음에 덧씌워진다. 그렇기에 완벽한 무(無) 상태로 돌아가는 ‘지움’이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인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제는 지우개 대신 붓을 들어보기로 한다. 지워지지 않아 얼룩진 자리 위에, 얇아져서 바스락거리는 마음에 조금 더 따뜻한 색의 물감을 얹어본다. 지나간 흔적을 없애는 대신 그 위에 새로운 오늘을 덧칠해 나가는 것. 흉터였던 자리가 새로운 그림의 배경이 되고, 꾹 눌린 자국이 글씨의 깊은 음영이 되어주는 과정.

바람이 불어와 서랍 속 묵은 향기를 실어 나른다. 여전히 그곳에는 지우지 못한 흔적들이 가만히 숨을 죽이고 있지만, 이제는 그 자국을 보아도 마음이 쓰라리지 않다. 지우지 못해 남겨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만들어준 고마운 조각들로 가만히 품어주기로 했기 때문이다.


마음에 조용한 평화가 찾아온다. 흔적을 지우려 애쓰던 긴 여행을 끝내고, 나는 비워진 여백이 아닌 한 층 더 깊어진 마음으로 오늘을 살아가기 시작한다.


시간의 서랍을 닫고 돌아섰을 때, 내 손끝에는 아무것도 쥐어져 있지 않았다. 지우려고 애쓸 필요도, 품어 안으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물길을 막던 돌멩이를 치우면 물이 스스로 흐르듯, 내 안의 모든 지나간 것들은 내가 잡아두지 않는 순간 이미 저만의 속도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흔적’이란 애초에 지워야 할 오점이 아니라, 삶이라는 거대한 화폭 위에 시간과 내가 교차하며 남긴 유일한 지문(指紋)이었다. 빛이 강할수록 그림자가 짙어지듯, 아팠던 흔적의 깊이만큼 내 삶의 여백도 깊어졌음을 비로소 깨닫는다. 지워진 줄 알았던 자국 위에서 마침내 새로운 언어가 싹을 틔운다. 억지로 써 내려간 문장이 아닌, 비워진 마음에 가만히 차오르는 조용한 진실의 고백들.


우리는 흔적을 지움으로써 비워지는 것이 아니라, 그 흔적들과 온전히 화해함으로써 새로워진다.

이제 창밖으로 새벽이 깊어가고, 첫 빛이 유리창의 희미한 흔적을 조용히 지워낸다. 아무것도 지우지 않은 채로, 모든 것이 가장 아름답게 지워진 순간이다. 나는 펜을 들어, 지워진 자리 너머의 첫 문장을 쓰기 시작한다.


그렇게 남아 있던 흔적을 지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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