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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입은 사람을 벗다

낡은 허물을 벗듯

by구시안
계절 구시안 가을.jpg


사람이 변한다는 사람도 있고

사람은 변하지 않는다는 사람도 있다.


나는 사람을 오래 입고 살았다.

기억의 실타래가 올올이 얽혀 만든 옷이었다. 어떤 날은 추위를 막아주는 두꺼운 외투였고, 어떤 날은 피부에 착 감겨 내가 그 사람인지 그 사람이 나인지 구별할 수조차 없던 부드러운 셔츠였다. 오래 입은 옷이 그렇듯, 그 사람 역시 내 몸의 곡선과 걸음걸이, 심지어 조용히 숨을 내쉬는 습관까지 기억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며 옷깃은 닳고 소매 끝은 털실이 올올이 풀려갔다. 익숙함이라는 온기는 어느새 나를 구속하는 무거운 무게가 되어 어깨를 눌렀다. 우리는 서로에게 너무 많은 때가 묻었고, 너무 깊은 주름이 패어 있었다. 그럼에도 선뜻 벗어던지지 못했던 것은, 이 옷을 벗어버리면 그 안에 남은 내 알몸이 너무나 허전하고 추울 것 같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어느 차가운 새벽, 조용히 단추를 하나씩 풀어내린다.

오랜 세월 가슴팍을 세차게 채웠던 단추가 툭,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손끝에 닿는 감촉은 서늘하지만,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알 수 없는 가벼움이 밀려든다. 소매를 빼내고 어깨를 넓힐 때, 피부 위로 낯선 바람이 스쳐 지나간다. 마침내 마른 허물처럼 바닥으로 스르르 떨어져 내리는 '사람'이라는 옷.


바닥에 단정히 접혀 놓인 그 시절을 내려다본다. 비록 마모되고 닳아 없어졌을지언정, 그 옷은 나를 가장 찬란하고 또 가장 아프게 지켜주었던 하나의 세계였다.


나는 맨살로 선다. 피부에 닿는 아침 공기는 여전히 서늘하지만, 더 이상 무겁지 않다. 오래 입은 사람을 벗어던진 자리마다, 새로운 계절이 숨을 쉬기 시작한다.


벗어놓은 허물은 정적 속에서 조금씩 체온을 잃어갔다. 나를 감싸던 온기가 식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일은, 한 시절의 종말을 그저 묵묵히 증언하는 일이었다. 비로소 가벼워졌으나, 가벼워진 만큼 서늘한 공기가 온몸의 땀구멍마다 스며들었다. 무거운 옷을 털어낸 어깨는 자유로웠지만, 자유란 늘 이렇듯 휑한 빈자리를 먼저 내어주는 법이었다.


방 한구석에 덩그러니 놓인 '그 사람'이라는 옷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단추가 떨어진 자리, 손때가 묻어 반질거리는 옷깃, 자주 눌려 찍힌 팔꿈치 근처의 주름들. 그 주름 속에는 우리가 함께 통과했던 비바람과, 흩날리던 낙엽과, 눈부셨던 한낮의 햇살이 가만히 접혀 있었다. 비록 지금은 벗어야만 살 수 있는 구속이 되었을지라도, 한때 그 옷은 세상의 어떤 추위로부터도 나를 지켜주던 유일한 온기였다.


나는 조용히 무릎을 꿇고, 바닥에 허물어진 옷을 가만히 매만졌다. 그리고 단정하게 접어 올렸다. 미움이나 원망으로 구겨 넣지 않고, 한 겹 한 겹 깃을 세우고 모서리를 맞춰 접어두었다. 그것은 나를 지나간 한 사람에 대한 예의이자, 그를 입고 견뎌냈던 내 청춘에 보내는 마지막 안부였다.


창문을 조금 열자, 새벽의 스산한 바람이 밀려들었다.

맨살에 직접 닿는 바람은 매서웠지만, 이상하게도 생생했다. 두꺼운 옷감에 막혀 느끼지 못했던 공기의 세밀한 결, 피부를 간지럽히는 아침 햇살의 미세한 파동이 온몸으로 고스란히 전해졌다. 아프도록 또렷한 감각. 나는 비로소 내가 살아있음을, 나라는 존재가 타인의 온기에 더부살이하지 않고 스스로 숨 쉬고 있음을 깨달았다.


옷장 깊은 곳, 그 단정하게 접힌 시절을 가만히 밀어 넣는다. 문을 닫자 둔탁한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방 안에는 온전히 나만의 침묵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이제 새로운 옷을 찾아 나설 차례다. 그것이 또 다른 사람의 온기일지, 아니면 홀로 견뎌내야 할 단단한 홀로서기의 외투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분명한 것은, 이 맨살의 서늘함을 기꺼이 껴안은 자만이 다음 계절의 더 따스한 햇살을 온전히 입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깊게 숨을 들이쉬며, 서늘하지만 맑은 아침 속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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