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거리에서
깊은 밤을 보낸 노동이 끝나고 마주한 새벽의 거리에서 지난 하루의 고단했던 숨을 뱉는다.
사람이 없는 한적한 이 거리.
사람들의 숨들이 증발한 이 새벽의 거리.
숨을 쉰다.
오늘 하루 쉴 숨이 부여 될 대기에서 뿜어진 수증기로 갈증을 달랜다.
오래된 라디오 주파수를 맞추듯, 세상의 소음 속에서 문득 특정한 파장이 선명하게 귓가를 파고드는 순간이 있다. 그것은 누군가의 거창한 위로도, 논리적인 설득도 아니다. 다만 나와 정확히 같은 각도로 구부러진 마음의 결을 발견할 때, 우리는 언어의 성채를 무너뜨리고 단숨에 서로의 영토로 미끄러져 들어간다.
우리는 평생토록 타인의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방법을 배우지만, 대부분의 시도는 문 앞에서 멈춰 서기 마련이다. 타인의 고통은 언제나 감히 측량할 수 없는 심해처럼 아득하고, 기쁨은 때때로 투명한 유리벽 너머의 풍경처럼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완전한 이해란 애초에 인간에게 허락되지 않은 기적에 가까우므로, 우리는 늘 외롭고 조금은 서툴다.
그러나 그 거대한 단절의 틈새를 기적처럼 메우는 순간이 있다. 설명하려 애쓰지 않아도 누군가 나의 침묵을 통역해 낼 때, 혹은 슬픔의 밑바닥에서 건져 올린 눈빛 하나가 내 것과 포개어질 때 찾아오는 파동. 그것이 바로 동감이다.
동감은 동의와는 다르다. 그것은 상대의 논리에 고개를 끄덕이는 이성적 행위가 아니라, 상대의 체온을 내 피부 위에 고스란히 옮겨 적는 신체적 반응에 가깝다. 네가 흘린 눈물의 염도가 내 목구멍에 쓰라리게 감겨올 때, 비로소 우리는 서로에게 유령이 아니게 된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에게 각자의 섬에서 홀로 버티기를 강요한다. 타인의 삶에 너무 깊이 개입하지 말 것, 혹은 상처 입지 않도록 적당한 거리를 유지할 것. 하지만 그 차가운 격리의 원칙을 가볍게 무력화하는 것은 언제나 타인의 연약함이다. 나만 홀로 이 계절의 바닥을 헤매고 있는 줄 알았을 때, 어둠 속에서 건너온 그 나직한 메아리 하나.
나도 그래.
유치하지만 절대 가볍지 않은 누군가의 음성을 듣고 하는 대답이 얼마나 값진 것인지 나는 잘 알 고 있다.
그 짧은 고백이 이토록 거대한 온기를 품고 있는 이유는, 그것이 세상이라는 거대한 미로 속에서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마음과 마음이 가만히 겹쳐지는 그 찰나의 결핍 속에서, 우리는 작은 온기 실려 온 그것에 살아 있다는 실감을 배우기도 하니까.
내게는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원형의 본질이 아름다운 것들을 좋아하는 나로서는 늘 그랬다. 예술이라는 것이 장르가 다르지 않다고 생각하며 모두가 이어져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림. 바카라. 조각. 파인아트 모두가 나에게는 이어져 있는 이야기처럼 보인다. 그중 하나인 나는 글이라는 공간에 자리하고 있을 뿐이다. 한 사람이 뱉어낼 수 있는 이야기가 동감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거닌다.
타인의 마음을 어림짐작하는 일은 언제나 실패를 전제로 한 시도였다. 손끝에 잡히지 않는 모래알처럼 사람의 내면은 쉽게 부서졌고, 언어는 그 부서진 틈새를 메우기에는 너무나 엉성한 도구였다. 무엇을 건네어도 격차가 생겼고, 어떤 위로를 건네어도 끝내 혼자 남겨지는 방이 있었다. 세상의 모든 문장들이 저마다의 외로움을 증명하기 위해 쓰인 것처럼 느껴지던 날들이었다.
문학도 마찬가지였다. 바카라장을 펼치면 그곳에는 언제나 거대한 타인의 사막이 펼쳐져 있었다. 작가들이 정교하게 쌓아 올린 문장의 성벽은 높고 견고해서, 평범한 독자인 내가 감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어 보였다. 타인의 비극을 구경하거나, 혹은 정제된 아름다움 속에서 한 발짝 물러나 감탄하는 것 외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는 듯했다. 텍스트는 차가웠고, 인쇄된 글자들은 저마다 완고한 생채기를 품은 채 고립되어 있었다.
그러나 어떤 문장은 예고도 없이 그 견고한 성벽을 허물어뜨렸다. 수백 년 전의 사막에서, 혹은 지구 반대편의 낯선 방에서 쓰인 몇 줄의 고백이 거짓말처럼 내 방의 공기를 완전히 바꾸어 놓는 순간이 있었다.
내가 평생 동안 단 한 번도 입 밖에 내지 못했던 비루한 질투나, 밤마다 몰래 삼키던 남루한 불안이 정확하게 활자화되어 눈앞에 놓여 있을 때의 충격. 그것은 지식을 습득하는 일과는 완전히 달랐다. 그것은 타인이 내 영혼의 비밀을 먼저 훔쳐다 기록해 둔 것 같은 기묘한 해방감이었다.
작가는 나를 알 리가 없었다. 우리의 언어와 시대와 삶의 결은 달랐지만, 그들이 문장 속에서 가감 없이 드러낸 부끄러움과 결핍은 내 것과 놀라울 정도로 포개어졌다.
바카라을 덮고 나면 거대한 고독이 밀려오던 예전과 달리,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세상의 누군가도 나와 정확히 같은 각도로 웅크려 이 계절을 견뎌냈다는 사실. 문학은 결국 완벽한 문장으로 타인을 가르치는 예술이 아니라, 가장 연약한 실수를 공유하며 서로의 존재를 더듬어 찾는 거대한 지문이었다.
타인의 방에 영원히 들어갈 수 없으리라 절망하던 밤, 문학은 얇은 종이 한 장을 사이에 두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너만 그런 게 아니라고.
그 짧은 공명의 순간, 활자는 더 이상 검은 잉크의 덩어리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우주 속에서 겨우 찾아낸, 서로의 온도를 확인하는 투명하고 단단한 손이었다.
나는 동감이 물들어 있는 하루를 말없이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