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쓴 티가 나는 제안서는 떨어진다

대행사 선정 입찰 심사에서 목격한 AI 활용의 민낯

by이형주 David Lee


최근 몇 달간 여러 심사장에 앉았다. 해외 전시회 공동관 부스 장치 대행사 선정, 국제회의 운영 및 홍보를 위한 PCO 선정 등 분야는 다르지만 심사장에서 받은 인상은 놀랍도록 비슷하다.

제안서의 두께는 예전보다 두꺼워졌고 슬라이드 수도 늘었다. 그런데 정작 읽고 나면 남는 게 별로 없다. 문장은 매끄러운데 핵심이 안 보인다. 같은 얘기를 표현만 바꿔서 세 번, 네 번 반복한다. 오타는 오히려 예전보다 많아졌다. 누가 봐도 ChatGPT로 초안을 뽑고, 그대로 슬라이드에 붙여 넣은 티가 난다. AI를 쓰는 것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사실 그다음이다.


발표자도 이해 못하는 제안서


어느 PCO 선정 심사에서 제안사가 홍보 전략 파트에 다양한 채널별 실행 계획을 나열했는데, 정작 "이 회의의 핵심 참가 타깃이 누구라고 생각하는지" 물으니 답이 궁색했다. 슬라이드에 쓰인 타깃 정의와 발표자의 답변이 서로 어긋났다. 자기가 만들지 않은 자료를 발표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우기 어려웠다.


또 다른 심사에서는 특정 장소를 행사 공간으로 제안한 팀에게 "왜 이 공간을 선택했는지, 이 장소가 갖는 의미가 행사 콘셉트와 어떻게 부합하는지"를 물었다. 슬라이드에는 공간의 규모와 시설 스펙만 나열되어 있을 뿐, 그 공간을 선택한 이유에 대한 논리는 없었다. 발표자도 명확한 답을 내놓지 못했다. AI는 공간의 정보를 정리하는 데는 유용하지만, "왜 다른 곳이 아니라 이곳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는 답을 주지 못한다. 그건 기획자의 안목과 해석이 들어가야 하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부스 디자인 제안에서도 같은 패턴이 반복됐다. 렌더링 이미지는 화려했다. 곡선형 구조에 대형 미디어월, 조명 연출까지 공들인 흔적이 보였다. 그런데 "이 디자인이 참가기업들의 참가 목적과 어떻게 연결되는지" 물으니 답이 없었다. 참가기업들이 이 전시회에 나가는 이유는 저마다 다르다. 신규 바이어 발굴이 목적인 기업도 있고, 브랜드 인지도 제고가 목적인 기업도 있다. 그 목적에 따라 부스 동선과 상담 공간의 구성은 달라져야 한다. 하지만 제안서의 디자인은 목적과 무관하게, 그저 시각적으로 화려한 콘셉트 하나를 모든 기업에 동일하게 적용하고 있었다. 맥락 없이 예쁘기만 한 디자인이었다.


심사위원이 확인하고 싶은 것은 슬라이드의 정보량이 아니다. 이 회사가, 이 사람이 우리 프로젝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가다.


AI를 쓰는 것과 AI에 기대는 것의 차이


오해하지 말아야 할 것은, AI로 제안서를 준비하는 것 자체를 비판하려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금 시대에 AI를 전혀 쓰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다. 자료 조사, 초안 작성, 문장 다듬기 — AI가 도와줄 수 있는 영역은 많고, 이를 잘 활용하면 준비 시간을 크게 줄일 수 있다.


문제는 AI가 만든 결과물을 검증 없이 그대로 쓰는 태도다. AI는 그럴듯한 문장을 빠르게 만들어내지만, 그 문장이 이 프로젝트의 맥락에 맞는지, 실무적으로 실행 가능한지는 판단하지 않는다. 그 판단은 사람의 몫이다. 이 판단 과정, 즉 검증하고 자기 언어로 재구성하는 과정을 생략한 제안서가 바로 심사장에서 걸러지는 제안서다. AI를 쓰는 것과 AI에 기대는 것은 다르다. 전자는 도구를 활용하는 것이고, 후자는 사고를 아웃소싱하는 것이다.


왜 심사위원은 오히려 낮은 점수를 주는가


역설적이게도 AI로 인해 모든 제안서의 외형적 완성도가 상향평준화되면서 심사 기준은 오히려 더 까다로워졌다. 예전에는 매끄러운 문장과 깔끔한 디자인만으로도 어느 정도 점수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니다. 매끄러운 문장은 이제 기본값이 되었고, 그 위에서 무엇이 진짜인지를 가려내는 것이 심사위원의 일이 됐다.


그래서 요즘 심사장에서는 오히려 다소 투박하더라도, 발표자가 자기 경험과 사례를 자기 언어로 설명하는 제안서에 더 높은 점수가 간다. 슬라이드가 화려하지 않아도,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고 프로젝트의 맥락을 정확히 짚어내는 팀이 신뢰를 얻는다.


이것이 지금 심사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AI시대의 역설이다. AI가 문서의 완성도를 높여줄수록, 평가는 문서 바깥의 것 — 즉 그 문서를 만든 사람의 이해도와 진정성으로 옮겨가고 있다.


AI시대의 역설: 다루는 사람의 실력이 더 잘 보인다


AI는 누구나 그럴듯한 제안서를 만들 수 있게 해 줬다. 그런데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이제는 그럴듯함만으로는 차별화되지 않는다. 오히려 도구가 평준화될수록, 그 도구를 다루는 사람의 사고 깊이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


결국 제안서 경쟁력을 가르는 것은 AI를 썼는지 여부가 아니다. AI가 만든 초안을 딛고, 그 위에 자기만의 이해와 경험을 얹었는지 여부다. 심사위원은 그 차이를 생각보다 정확하게 읽어낸다. AI시대에도, 어쩌면 AI시대이기 때문에 더욱, 진정성 있는 제안서가 이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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