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호, 반가운 가을이다

by루미상지
오전 6시 떠오르는 태양과 가을 하늘


길고 무더웠던 지난여름을 잘 이겨내니 거짓말처럼 쾌청한 가을이 찾아왔다.

아침에 눈을 떠 창문을 여니 습하던 여름 공기 대신 9월의 맑은 바람이 먼저 반긴다. 시시각각 색깔과 모양을 바꾸며 색다른 작품을 만들어 내는 가을 하늘이다. 매일 아침 하늘을 보고 사진을 찍는 것이 일상이 되었다. 무더위에 지친 아이들과 친구들에게 하늘 구름 사진으로 아침 인사를 한다. 그러면 기다렸다는 듯 저마다 찍은 사진을 보내오며 9월 하늘 예찬을 펼친다.


누렇게 익어가는 가을 들녘의 벼

토요일 이른 아침, 남편과 나는 가을 기운 가득한 고원길 걸을 준비를 한다. 남편 ‘꾸미’는 나보다 먼저 일어나 부엌에서 달그락달그락 가을 숲길에서 나눌 소박하고도 정성 어린 도시락을 싼다. 동부콩이 듬뿍 들어간 밥을 안치고, 따끈한 달걀찜을 하고, 요즘 한창 제철을 맞아 새콤달콤 맛 좋은 홍로 사과를 가지런히 깎아 도시락에 담는다. 거기에 우리만의 특별 간식도 하나 더 준비한다.


지난봄, 속칭 진안 꾸미루미 농장에서 우리가 직접 캔 쑥으로 만든 인절미를 준비하는 것이다. 지난 한 해 동안 방콕살이를 하느라 비워놓은 농장은 일 년 만에 돌아왔을 때 쑥대밭이 되어있었다. 올봄 마당과 밭, 언덕 등 온통 쑥 천지인 농장에서 우리는 주위를 돌며 쑥을 듬뿍 캤다. 캔 쑥을 깨끗이 씻고 데쳐 꼭 짜서 미혜가 농사지어 보내온 찹쌀과 같이 방앗간에 갔다. 그렇게 올봄 쑥 인절미를 세 번이나 했다. 첫 번째는 가까운 주위 분들에게 나눠드리고, 두 번째는 멀리 사는 친구와 동생들에게 보내주었다. 정성이 들어간 귀한 인절미라며 모두 좋아했다. 우리가 직접 캔 쑥으로 정성스럽게 만든 쑥 인절미여서 나누는 기쁨이 더 컸다. 세 번째는 냉동실에 가득 넣어 놓고 일 년 내내 먹는다.

남편 '꾸미'는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전날 밤 꺼내놓아 알맞게 녹은 인절미를 먹기 좋은 크기로 잘라 고소한 콩가루를 묻혀 담고, 조그만 통에 꿀도 함께 챙긴다.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도시락 싸는 그의 뒷모습에는 계절의 풍요와 온기를 나누고자 하는 기쁨이 가득하다.

길을 걷다 지칠 때쯤 꿀과 함께 꺼내면 걸음 동무들의 손들이 바쁘게 반긴다. 그 재미에 꾸미는 매주 토요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도시락을 싸고 고소한 인절미를 빚는다.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달려간 진안고원길은 계절의 선물 그 자체다. 맑은 하늘 아래 시원한 바람이 가슴 깊숙이 들어오고, 길가의 코스모스는 무더위를 훌훌 털어낸 듯 한들한들 기분 좋게 춤을 춘다.

풍성하게 물들어가는 가을 들길을 걷는다. 가혹했던 여름의 뜨거운 햇볕을 견뎌내고 하루가 다르게 누렇게 여물어가는 가을 들판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진다. 들판 곳곳에서는 결실을 앞둔 농부들이 가을 햇볕 아래 엎드려 마지막 땀을 흘리고 있다. 황금빛으로 익어가는 나락을 품은 논, 강한 햇살을 받아 더욱 붉어지는 볼 빨간 사과, 풍성한 줄기를 쭉쭉 뻗어가는 고구마 순도 보인다. 밭두렁에는 누런 호박들이 펑퍼짐하게 앉아 가을 햇살을 즐기고 있다. 늙은 호박 옆에는 어린 초록 호박과 늦게 피어난 호박꽃도 오순도순 함께 앉아 있다. 조금 따가운 가을 햇살이지만, 지난여름의 더위에 비하면 기분 좋은 따사로움일 뿐이다.

'봄볕에 며느리 내놓고 가을볕에 딸 내놓는다’

속담처럼 살갗에 닿는 햇살이 선선한 바람과 어우러져 그저 반갑기만 하다. 들길에는 가을 들꽃도 무더위를 이겨내고 산뜻한 색깔의 꽃들을 기특하게 피워내고 있다. 길을 걸으며 만나는 작은 들꽃 하나하나와 눈을 맞추고, 고개 숙여 은은한 향기를 맡으며 사진을 찍는다. 그리고 들판의 모든 생명들과 마음속 깊은 사랑의 대화를 나눈다.

“올여름은 다른 해보다 더 많이 힘들었어요. 더위와 가뭄, 장마가 무서웠어요. 하지만 꾹 참고 묵묵히 우리의 임무를 다해냈어요.”

“그래그래. 고생 많았다. 잘 견뎌주어 고맙다. 애썼다.”

가을 들판처럼 넉넉한 마음으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칭찬해 주었다.

정겨운 마을 길로 들어서자 담장 너머로 토실토실 익어가는 감과 밤송이, 석류가 반긴다. 대추나무엔 초록빛 대추가 다닥다닥 맺혀있고, 잘 여문 참깨 단은 흙 담벼락에 기대어 햇볕을 쬐고 있다. 푹푹 찌는 폭염을 견뎌내고 풍성한 결실을 맺어준 열매들이 더없이 대견하다. 40도 가까운 기록적인 더위와 예측할 수 없는 기상이변에 인간은 에어컨의 도움을 받으며 견뎌냈지만, 들판의 곡식과 들꽃들은 오롯이 온몸으로 이겨내며 묵묵히 견뎌내지 않았던가!


동부꽃, 호박꽃, 가을 호박, 꽃사과, 마타리, 생강나무 열매, 억새, 수크령, 작살나무 열매


그들이 있었기에 우리는 오늘 이 풍요롭고 눈부신 가을 선물을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바람을 따라 산속으로 접어들자 나뭇잎 사이를 흔드는 바람과 함께 작은 노랫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온다.

“산 위에서 부는 바람 시원한 바람, 그 바람은 좋은 바람 고마운 바람......”

우리가 어릴 때 많이 불렀던 동요로 윤석중 시 '산바람 강바람'이다. 살짝 뒤돌아보니 이번 시즌 고원길 걷기에 처음 오신, 모르는 분이다. 지난여름 지친 마음을 쓸어내리듯 나도 같이 노랫말을 따라 부른다. 마음까지 시원해지며 웃음이 나온다. 4년 전 고원길을 처음 걸을 때 나도 이 노래를 불렀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누군가는 꼭 이 노래를 부른다. 상큼한 가을바람을 맞는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누구에게나 똑같은 감동으로 다가오나 보다.

환경 학자들은 지구온난화로 인해 극단적인 폭염과 기상이변이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이라 경고한다. 우리가 사랑하는 봄과 가을은 점점 더 짧아지고 여름과 겨울은 더 길어지며 열대야와 집중호우는 더 심해질 것이라 한다. 그래서인지 지금 맞이하고 있는 하루하루가 더 소중하게 느껴진다.

화창한 9월 하늘은 미세먼지 하나 없이 높고 맑고 푸르다. 상큼한 공기는 더욱 눈부시게 다가온다. 시련을 이겨내고 알곡을 여문 들판의 곡식들, 때맞춰 피어난 들꽃들, 지난 계절을 무사히 건너온 모든 생명에게 아낌없는 찬사와 감사를 보낸다.

“얘들아! 어렵게 만난 이 가을을 우리 맘껏 즐기자.”






*꾸미루미: ‘꿈을 이루는 가족이 되자’. ‘꿈 이룸이’로 아이들이 어릴 때 지은 우리 가족 이름입니다. 꾸미는 남편의 애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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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