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연이의 글씨가 유독 눈에 들어온 건, 초등학교 3학년이 되어도 좀처럼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 아들 때문이기도 했다.
바카라 읽기와 글씨 쓰기를 억지로 강요해서 더 싫어하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다. 잔소리를 조금 거두고 마음껏 두었더니, 아들의 글씨는 어느새 알아보기조차 힘든 모양새로 흘러가 버렸다. 그렇다고 매일 붙들어 앉혀 교정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나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내가 먼저 쓰는 모습을 보여주자.’
캘리그래피를 배워볼까 싶어 강좌를 뒤적이다가, 우선은 집에서 한 글자씩 연습해 보기로 했다. 펜과 교본을 하나씩 사서, 하루에 네다섯 장씩 따라 썼다. 막상 써 보니 잡생각이 잦아들고, 글자 하나하나에 마음을 얹는 시간이 꽤 좋았다. 얼마나 힘을 주고 있는지, 어디서 힘을 빼야 하는지, 글자 사이 간격은 적당한지. 조금만 방심해도 금세 균형이 무너졌다. 종이 위에 남는 건 글씨가 아닌 집중의 흔적이었다.
집에서 연습하고 있으면 아이들이 쪼르르 달려와 말했다.
"엄마! 나도 해볼래!"
그 말이 반가워 얼른 펜을 건네주면, 아이들은 제 이름을 써 보고 몇 글자 끄적이다가 금세 흥미를 잃고 자기들 놀거리를 찾아 흩어졌다. 정작 가장 보여주고 싶었던 아들은 곁눈질 한 번 하지 않았다.
우리 도서관의 ‘릴레이 필사’도 비슷했다. 처음에는 신기함과 심심함에 이끌려 적지 않은 아이들이 참여했지만, 시간이 지나자 관심은 금세 식어 버렸다. 필사 코너는 아이들이 걸터앉아 떠드는 수다의 장이 되었고, 종이 치면 이내 교실로 흩어졌다.
그래도 이연이는 달랐다. 글씨는 엉성했지만 거의 매일 도서관에 들러 한 줄이라도 쓰고 갔다. 친구들까지 데려와 함께 필사하고, 간식도 받아 갔다. 명예 도서부원이라 불러도 손색없을 만큼 든든한 홍보위원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하교가 끝나고 도서관도 문을 닫을 채비를 하던 무렵 이연이가 찾아왔다.
"선생님, 혹시 배터리 충전할 수 있어요?"
필사 테이블이 무선 충전이 가능한 바카라상으로 바뀐 걸 알고 온 모양이었다. 하지만 전원선이 짧아 아직 연결하지 못한 상태였다. 당장 쓸 수 있는 건 내 개인 충전기뿐이었다.
"테이블 충전기는 아직 안 되고, 선생님 충전기만 있는데 곧 퇴근해야 해."
"잠깐이라도 충전해 주시면 안 될까요?"
"뭐 급하게 받을 연락 있어? 이리 가져와 봐~"
휴대폰을 건네는 틈 사이로 가벼운 대화를 건넸다.
"학교 끝났는데 이제 집에 가? 학원 가? 아니면 친구 만나?"
"그냥 뭐. 학원은 안 다녀요. 남친이 이쪽으로 온다고 해서 만날 것 같아요."
"어머, 남자친구도 있어?"
"네. 친구 남친의 친구인데 놀러 갔다가 만나게 됐어요. 고등학생이에요."
그동안 꽤 친해졌는지, 아니면 조용한 도서관에 둘만 남은 공기가 어색했는지, 이연이는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술술 풀어놓았다.
충전기를 꽂아 두고 나는 못다 한 일을 마무리했다. 심심해진 이연이는 교실과 복도를 왔다 갔다 하더니,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퇴근을 앞두고 있던 나는 조심스럽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꺼냈다.
"너, 오늘부터 끝나고 딱 10분만 도서관 와서 글씨 쓰다 갈래?"
"네? 웬 글씨요? 저 바빠요."
정색하며 손사레를 친다.
"바쁘긴. 학원도 안 다닌다며. 간식 하나 더 줄게. 딱 한 장만, 획쓰기만 하고 가. 다음 이벤트 준비 중인데 이연이한테 먼저 해보게 하려고. 나 좀 도와줘. 충전도 해줬잖아."
"나 원 참. 충전해 주고 생색내시는 거예요?"
"그럼~세상에 공짜가 어딨니?"
"...알았어요. 딱 한 쪽만 쓸 거예요."
"좋아. 협상 체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