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배우다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씨앗의 문장들

by운채




가끔 온라인카지노 서랍을 연다.

몇 달 전, 몇 년 전에 써 두고 미처 발행하지 못한 글들이 거기 쌓여 있다. 제목만 보고는 무슨 내용이었는지 기억 나지 않는 것도 있다. 스크롤을 내리다 손이 멈춘다. 페이지에서 보이지 않으면 잊는다. 그게 맞는 이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서랍을 여는 순간, 잊었던 문장 하나가 다시 걸어 나온다. 그 문장을 쓰던 밤도, 그때의 마음도 같이 따라 나온다. 후회가 되기도 하고 미련이 되기도 하고, 어느 날은 그냥 추억이 되기도 한다.


서랍은 온라인카지노에만 있는 게 아니다. 밀리로드에도 써 놓고 마무리 못 한 이야기가 있고, 여기저기 공모전 공고를 뒤지다가 옮겨 적어 둔 소재 목록도 있다. 이 소재는 저기에, 저 문장은 여기에 어울릴 것 같아서 옮겨 놓고는, 정작 어디에도 완성하지 못한 것들. 나는 그렇게 여러 서랍을 동시에 열어 놓고 산다. 하나를 채우다가 다른 하나가 비어 보이면 그리로 건너가고, 건너간 자리에서 또 다른 빈자리를 발견한다. 소재는 계속 쌓이는데, 완성은 그 속도를 못 따라간다.


소설을 쓸 때는 다른 근육을 쓴다. 심야의 사주카페 를 쓸 때는 방 안의 모든 것을 내가 정한다. 서랍 속 물건, 팔찌에서 빠지는 구슬의 개수, 계단의 숫자. 인물이 무엇을 보고 무엇을 감추는지도 내가 결정한다. 세계를 짓는 일이다. 벽돌을 하나씩 놓고, 그 벽돌이 서로 맞는지 확인하는 일.


에세이를 쓸 때는 반대다. 지을 게 없다. 이미 있었던 일에서, 이미 있었던 나에게서, 뺄 것만 남아 있다. 짓는 사람이 갑자기 허무는 사람이 된다. 그 전환이 매번 낯설다.


레이먼드 카버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내가 써 온 글이 다 군더더기였다는 걸 알았다. 감정을 말하지 않고 사물로 보여 주는 문장들. 형용사를 하나 지우면 문장이 더 단단해진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 절제를 배우고 싶었다. 그런데 그 절제가 아직 내 것이 되지 않았다. 문장을 쓰다가,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한 줄 더 붙이고 싶어질 때가 있다. 다 쓰고 나서 다시 읽으면, 지운다고 지웠는데도 어딘가에 설명이 남아 있다. 그럴 때마다 멈칫한다. 이게 카버인가, 아니면 아직 단단해지지 않은 나인가.


김애란의 문장은 다르다. 절제하면서도 따뜻하다. 뺄 건 빼지만, 사람을 끝내 놓지는 않는다.

바카라상 위엔 작은 바카라꽂이를 만들어 뒀다. 카버의 대성당과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 그 옆에 김애란의 바깥은 여름과 이중 하나는 거짓말. 막힐 때마다 손에 잡히는 대로 뽑아서 아무 페이지나 편다. 그러고 나서 다시 내 글로 돌아오면, 방금 읽은 문장의 온도가 잠깐 남아 있다가 서서히 식는다.


뒤돌아 앉은 바카라장에는 김애란의 비행운과 안녕 주정뱅이, 이유리의 브로콜리 펀치가 꽂혀 있다. 그리고 자평진전. 사주를 볼 때 펼치는 그 바카라은, 언제든 꺼낼 수 있게 손이 가장 잘 닿는 자리에 쌓아 두었다. 글을 쓰는 손과 사주를 보는 손이 실은 같은 손이라는 걸, 바카라상 배치가 나보다 먼저 알고 있다.

나는 그 사이 어딘가에 있다. 아직 어느 쪽으로도 완전히 기울지 못한 채로.


지난주에 쓴 특이함 속 감춰진 마음의 마지막 문장을 두고 한참을 망설였다. "나는 특이한 사람이다. 이제 그 말을 부정하지 않는다." 카버라면 거기서 멈췄을 것이다. 이음매가 정중앙에 있다는 것, 자세히 봐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 거기서 끝내는 게 맞았다. 그런데 나는 한 줄을 더 붙였다. 지우면 카버였고, 남기면 나였다. 커서를 문장 끝에 두고 한참을 그대로 두었다. 결국 남겼다.



씨앗은 껍데기 안에서 오래 움찔거린다. 단단한 껍질을 뚫고 나오기까지, 그 안에서 몇 번이나 자기 자신과 부딪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밖에서 보면 그냥 가만히 놓여 있는 씨앗 하나일 뿐이다. 안에서는 매일 조금씩 금이 가고 있는데도.


나는 지금 그 안에 있다. 카버식과 김애란식이 양분이 되고 기초가 되어, 언젠가 운채식 글쓰기가 완성될 거라고 생각한다. 혹은, 지금이 이미 그 과정이라고.


서랍을 다시 닫는다. 다음에 또 열게 될 것이다. 그때는 지금 쓰는 이 글도, 서랍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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