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누군가에게 홀려서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생을 시작한다.
-<사랑의 생애- 이승우>
내 교실에 5년을 다니다 두 달 전 그만둔 아이들이 교실에 놀러 왔다. 고등학생이 되곤 처음 보는 거라 나도 마음이 설렜다. 뭘 해줄까?
그동안 아이들 수업 때마다 나는 열심히 빵을 구워 간식을 내놓았었다. 아이들은 진심으로 내가 만든 빵을 좋아했다. 그 생각이 들자, 빵을 구워주는 것 만한 선물이 없을 것 같았다.
빵을 구운 것도 몇 달 만이었다. 나는 새벽부터 반죽을 시작하고, 발효되길 기다리며 부지런을 떨었다. 그러자 요 근래, 자주 가라앉았던 마음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이런 마음은 무엇일까. 분명 안 해도 될 일을 만든 것인데, 번거롭고 귀찮아야 할 일이 어째서 이토록 즐겁게 느껴질까.
나는 <사랑의 생애>의 문장을 떠올렸다.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이다. 사랑은 사랑하기로 작정한 사람의 내부에서 자기 생을 시작한다. 사랑이 우리 안에 들어오는 순간, 우리는 도리 없이 사랑을 품은 자가 된다.'
이 소설의 첫 문장은 곧바로 나를 멈춰 세웠다. 처음엔 소설의 전개대로 연인의 사랑으로만 느꼈다. 하지만 나는 곧 사랑이 그렇게 좁고, 제한적 일리 없다고 생각했다.
연인뿐 아니라 자식이나 친구, 반려 동물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내 안에 들어온 순간, 나는 사랑의 숙주로서 사랑을 따라 사는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내가 가르치던 제자들에 대한 마음도 그랬다.
우리가 어떤 존재를 사랑하는 데는 뚜렷한 이유가 없다. 자식을 낳고 키우는 일도 그렇다. 자식을 두고, 이제부터 사랑을 시작할 거라고 다짐부터 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사랑은 이미 내 안에 들어왔고, 나는 그 사랑을 겪을 뿐이다.
결국, 사랑은 당하고 겪는 일이었다.
나는 오랫동안 내가 슬픔의 숙주라고 믿던 시간이 있었다. 하지만 슬픔이 나를 갉아먹을 때조차, 내가 사랑을 겪고 있었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내 아이들을 키우고, 학생들에게 읽고 쓰는 일을 가르치며, 길냥이에게 연민을 느끼던 모든 순간에 사랑은 생을 포기하지 않은 채 곁을 지키고 있었다. 사랑의 숙주로써의 역할은, 사랑이 머물기에 충분히 따뜻한 숙주가 되어주는 것, 그뿐이었다.
[나를 달래는 기록 # 10]
불행해질까 봐 행복해 지길 미루지 말자. 내 안에 사랑이라는 생명이 살러 들어온 이상, 나는 그저 그 생명이 꽃피우는 행복을 기꺼이 '겪으며' 살아가면 된다.
갓 구운 빵 냄새가 온 집안에 퍼지는 오늘, 나는 불행 대신 사랑에 대한 환대를 선택하며 나를 달래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