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서를 작성하다 보면 종종 마주치는 팝업창이 있다. ‘같은 이름의 파일이 존재합니다. 덮어쓰시겠습니까?’ 확인 버튼을 누르는 순간 이전에 쓰인 텍스트는 사라지고, 지금 화면에 띄워진 새로운 문장들만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이전으로 되돌릴 수 없다는 묘한 긴장감과 함께, 우리는 매일 낡은 것들 위에 새로운 것들을 덮어씌우며 살아간다.
사람의 기억이나 감정에도 이 덮어쓰기 기능이 꽤 유용하게 작동한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마음에는 불필요한 기억을 말끔하게 비워내는 '삭제' 버튼이 없다. 잊고 싶은 상처나 껄끄러운 감정을 지워내는 유일하고도 가장 확실한 방법은, 그 위에 새롭고 선명한 기억을 부지런히 덮어쓰는 것뿐이다.
유독 일이 꼬이고 마음이 무거운 날, 잡념이 끼어들 틈조차 없이 서사가 치밀한 영화 한 편에 깊이 몰입하고 나면 복잡했던 하루의 잔상이 한결 희미해지는 것을 느낀다. 머릿속을 부유하는 날것의 상념들을 차분히 에세이로 적어 내려가며 거친 초고를 다듬어가는 과정도 마찬가지다. 투박한 서글픔과 혼란은 백스페이스에 지워지고, 그 자리에 정제되고 단단해진 활자들이 새롭게 덮어씌워지며 비로소 마음은 본연의 온도를 되찾는다.
공간이나 사람에 얽힌 기억을 다루는 방식도 다르지 않다. 아픈 기억이 남아 있어 섣불리 가지 못했던 장소에 굳이 다시 찾아가, 고요하고 편안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행위. 그것은 지난날의 씁쓸했던 낡은 파일을 오늘 나의 안온함으로 과감하게 덮어버리는 일이다. 비록 그 밑바닥에는 예전의 흔적이 옅은 그림자처럼 남아있을지라도, 이제 수면 위로 떠오르는 것은 새롭게 기록된 오늘의 단단한 평온이다.
결국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이 무언가를 덮어쓰는 지난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어제의 미숙함 위에 오늘의 깨달음을 덮어쓰고, 상처받았던 어제 위에 조금 더 단단해진 오늘을 기꺼이 덧칠해 나가는 것. 그렇게 수없이 많은 덮어쓰기와 수정을 거친 끝에 남겨진 최종본이 바로 지금의 ‘나’라는 사람일 것이다. 내일은 또 어떤 낯설고 반가운 기억들이 오늘 하루의 빈칸을 다정하게 덮어씌워 줄지 가만히 기대해 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