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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면서 무수한 글을 읽고 쓰고 지나쳐 왔다. 정성껏 페이지를 넘기던 바카라의 문장들, 서둘러 타자를 쳐서 보냈던 메시지들, 그리고 마음이 베였을 때 일기장에 울컥 쏟아냈던 일상의 파편들. 하지만 그 수많은 낱말 중 지금의 내 안에 켜켜이 앙금처럼 남아 있는 글은 과연 얼마나 될까.
세상은 늘 더 새로워야 하고, 더 특별해야 하며, 남들의 눈에 띄어야 한다고 부추긴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정갈하게 다듬고 잘 꾸며진 문장들을 세상에 내어놓던 시절이 있었다. 내 감정의 깊이나 삶의 온도보다 타인의 시선과 공감에 더 신경 쓰던 때의 글들은 참 매끄럽고 근사해 보였지만, 돌아서면 금세 휘발되어 버리곤 했다. 겉은 화려하지만 막상 내 영혼에는 아무런 자국도 남기지 못한 채 공중으로 날아가 버린 셈이다.
진짜 내게 남은 글들은 역설적이게도 가장 투박하고 고요한 순간에 태어난 것들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 않으려 마음 깊은 서랍 속에 숨겨둔 외로움의 기록, 지친 하루의 끝에 스스로를 가만히 토닥이던 무던한 혼잣말, 혹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계절의 냄새를 잊지 않으려 노트 귀퉁이에 적어둔 짧은 낱말 하나. 잘 쓰려고 애쓰지 않고, 누구에게 증명할 필요도 없이 오롯이 나라는 사람을 통과해 나온 글들만이 시간이 흘러도 마르지 않고 내 안에 단단히 자리 잡았다.
나이가 들고 일상의 속도가 점차 묵직해질수록, 삶은 결국 ‘내게 남은 몇 줄의 글’을 찾아가는 과정이 아닌가 싶다. 거창한 수식어나 화려한 화법은 모두 벗겨지고, 마침내 뼈대만 남은 담백한 문장들. 내가 어떤 순간에 진심이었는지, 무엇에 마음을 뜯겼고 무엇으로 다시 일어섰는지를 가만히 증언해 주는 그런 글들 말이다.
오늘도 무수한 말과 글들이 도처에서 생겨나고 사라진다. 그 타전되는 소음들 사이에서 나는 문득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오늘 내가 세상에 보낸 혹은 마음에 품은 말들 중, 먼 훗날에도 내 곁에 따스하게 남아줄 글은 과연 몇 줄이나 될까 하고. 다듬어지지 않았더라도, 오롯이 나 자신에게 진실했던 그 작은 흔적들만이 내 삶을 지탱하는 진짜 문장으로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