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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에도 요령이 있다는 생각을 가끔 한다.
정말 도망치고 싶을 때는 오히려 멀리 갈 필요가 없다. 멀리 가면 여행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여행에는 계획이 필요하고, 숙소도 예약해야 하고, 돌아오는 날짜도 정해야 한다. 도망치러 갔다가 어느새 또 하나의 일정이 생긴다.
진짜 도망은 훨씬 소박하다.
평소보다 한 정거장 먼저 내려 걷는다거나, 집에 가기 싫어서 서점에서 한참을 서성이는 것. 냉장고에 먹을 것이 뻔히 있는데 괜히 편의점에 들러 새로운 과자를 하나 고르는 것도 좋다. 누구에게 설명할 필요 없는 작은 이탈들.
나는 이런 도망을 꽤 좋아한다.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으면서 잠깐 빠져나오는 것. 문제는 그대로 두고 나만 잠시 자리를 비우는 것. 이상하게도 그렇게 하고 돌아오면 아까까지 나를 꽉 붙잡고 있던 일들이 조금 덜 위협적으로 보인다.
물론 도망쳤다고 해서 문제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메일은 그대로 와 있고, 답해야 할 메시지도 남아 있고, 내일 해야 할 일도 여전히 내일을 기다리고 있다. 도망은 생각보다 성실하지 않다. 아무것도 대신 처리해주지 않는다.
그럼에도 가끔 필요한 이유는, 사람이 늘 문제와 마주 보고 있을 필요는 없기 때문일 것이다.
정면을 너무 오래 바라보면 오히려 아무것도 제대로 보이지 않을 때가 있으니까.
그래서 나는 도망을 아주 짧게 친다.
한 시간쯤.
때로는 십 분쯤.
그리고 충분히 딴짓을 한 뒤 다시 돌아온다.
돌아와 보니 세상이 달라진 것은 아니다.
그저 내가 조금 달라져 있다.
아까보다 덜 지쳐 있고, 조금 덜 심각하고, 무엇보다 다시 마주 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가 생겨 있다.
그러고 보면 내가 좋아하는 도망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잠깐 시야에서 벗어나는 일에 가깝다.
없어진 척하다가 다시 나타나는 것.
아무 일도 해결하지 않은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제자리로 돌아오는 것.
어쩌면 도망의 가장 좋은 기술은 잘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잘 돌아오는 것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