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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내린 뒤에는 괜히 천천히 걷게 된다.
비를 피할 때는 그렇게 급했는데, 정작 그치고 나면 서두를 이유가 없어진다. 우산을 접고도 한동안 손에 들고 다니며, 물기를 머금은 거리와 나무들을 한 번씩 둘러보게 된다.
비가 지나간 세상에는 유난히 색이 많다.
젖은 아스팔트는 검은색보다 검고, 벽돌담은 평소보다 붉다. 평소에는 회색으로만 보이던 건물도 비를 한 번 맞고 나면 저마다 다른 색을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된다.
나는 특히 간판을 보는 걸 좋아한다.
비가 오기 전에는 무심히 지나쳤던 작은 글씨들이 물기를 머금은 공기 속에서는 이상하리만치 또렷하게 눈에 들어온다. 오래된 세탁소 이름도, 골목 끝 분식집의 낡은 간판도 괜히 한 번 더 읽어 보게 된다.
비는 세상을 새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원래 있던 것들을 잠깐 선명하게 보여주는 재주가 있는 것 같다.
그래서 비가 그친 뒤에는 목적지가 있어도 조금 돌아간다.
빨리 도착하기에는 아까운 풍경들이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기다리는 것은 비가 아니라, 비가 지나간 뒤에만 잠깐 열리는 그 짧은 시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