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소 즐기지 않던 재즈 음악을 틀어놓고, 캐리어 구석에 박혀 있던 시집 한 권도 깨내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오징어땅콩을 치운 그 순간부터 이미 글러먹은 밤이었다.
그가 사는 원룸 건물로 입주한 날이었다.
며칠 만에 다시 본 사홍 앞에서 여자는 화색이 짙었다. 오늘 또 온라인 게임을 때려치운 여자 같지 않았다.
“사람들은 꼭 잘 곳까지 마련해주면서 타인을 함부로 다루려 하더라. 야만의 극치 아니니?”
그녀는 사홍 앞에만 서면 말을 더 많이 했다. 대부분 쓸데없는 말이었다.
그녀 트레이 위 접시가 남들보다 하나라도 적으면 어디선가 꼭 가재미 눈을 뜬 매니저가 나타나곤 해서 식겁했다는 등, 어제는 대답하라고 나무젓가락으로 자기 어깨를 툭 건드리길래 멱살을 잡을 뻔했다는 등. 건물 벽에 기댄 사홍 옆에서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 절반은 알아듣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가 한국어 서툰 중국인이란 사실은 그녀에게 아무런 문제도 아니었다.
“그래서 나 그만둔다는 말도 안 하고 새벽부터 기숙사 짐들 다 빼서 나온 거야.”
그가 담배 연기를 길게 뿜었다. 그리고 잠시 그녀를 바라보더니 다정하게 웃었다.
“잘했어. 누나.”
이상하게 그 말은 오래 남았다.
그는 젖은 티셔츠 차림으로 하루 동안 원룸 건물 계단을 몇 번이나 오르내렸다. 작은 냉장고를 들다 손등 핏줄이 불거졌고, 먼지 묻은 창틀을 대충 훔쳐낸 뒤 어디서 구해왔는지 은은한 빛깔의 꽃무늬 커튼까지 달아주었다.
“누나 이거 키워”
별일 아니라는 듯 사홍이 구석에 몬스테라 화분 하나를 내려놓았다. 그녀는 체리의 빈 와인병 옆에 몬스테라를 갖다 두었다. 붉은 색과 초록의 대비가 생기 넘쳤다.
와인병을 보면 아직도 그밤이 떠올랐다. 자정 무렵, 호텔 로비 문이 열리고 체리가 들어왔다. 그 뒤로 지배인이 보였다. 프런트에 앉아 있던 그녀에게 체리가 주황색 쇼핑백을 내밀었다.
“와인 좋아하세요?”
이미 술 한잔 걸친 모양이었다. 둘에게서 같은 냄새가 났다.
“아뇨, 별로.”
늦은 밤 두 사람의 등장에 당황한 그녀가 손을 내저으며 한걸음 물러섰다. 여고생처럼 수줍게 웃는 체리의 얼굴이 무엇보다 낯설었다. 프런트 끝 쪽에 서 있던 지배인이 어느새 조용히 다가와 말했다.
“마스터 키 하나만 주세요.”
“네? 마스터 키요? 하나만요?”
그녀가 눈을 얼마나 크게 떴는지 그들은 끝내 알아차리지 못하고 사라졌다. 그녀는 한동안 그대로 서서 엘리베이터 문만 바라봤다.
띵동.
사홍이었다. 말끔해진 그가 맥주 한 묶음을 손에 들고 있었다. 이삿짐을 날라주고 저녁에 술 사오겠다며 계단을 내려갈 때까지만 해도 그녀는 별 생각이 없었다. 재즈 음악을 틀고 시집을 꺼내고 오징어땅콩을 냉장고에 숨기듯 밀어넣은 것도 순전히 이사 첫날의 깔끔한 기분을 위해서라고 믿었다. 물론 거울은 여러 번 들여다봤다. 지난주 새치 염색을 한 건 참 잘한 일이었다.
“누나, 아직 저녁 안 먹었지?”
목소리가 맑았다. 그녀는 무심코 거울을 봤다. 입꼬리가 한참 올라가 있었다. 문득 수줍게 웃던 체리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밤 이후, 체리가 결근한 지 나흘 째 되던 날이었다. 호텔 프런트에 남자 두 명이 찾아왔다. 손님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들 중 한 사람은 로비 의자에 앉아 그녀를 바라봤고 다른 한 사내가 말을 걸었다.
“OO경찰서에서 왔습니다. 총지배인님 계시죠?”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마치 다 알고 왔으니 꼼짝 말라는 듯. 그녀는 조금 전 객실로 올라간 지배인에게 전화를 걸까 말까 망설였다. 그사이 젊은 형사는 자신의 휴대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로비로 내려온 지배인이 두 형사에게 다가갈 때 그녀는 갑자기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자리를 비웠다.
한국 요리를 배우고 싶다던 사홍은 생각보다 요리를 잘하는 것 같았다. 그는 평생 그녀 집 냉장고에 있어 본 적 없는 식재료를 들고 와 함께 먹을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무언가를 썰고, 넣고, 냉장고를 열었다 닫는 남자를 훔쳐보았다. 마치 네안데르탈인이 호모사피엔스를 관찰하듯.
그가 무슨 요리를 하는지보다 냉장고를 자기 집 냉장고처럼 뒤지는 모습이 더 신기했다. 그사이 여자는 거울을 열두 번도 더 봤고 그보다 더 자주 남자의 팔뚝을 쳐다봤다. 흠칫 놀라 시선을 떨구면 이번엔 짱짱한 그의 종아리가 눈에 들어오는 바람에 여자는 지은 죄 없이 뜨끔뜨끔 좌불안석이었다. 냉장고에 들여놓은 지 한 시간도 안 된 맥주를 꺼내 한 캔을 먼저 비우고 나서야 겨우 사람 흉내를 낼 수 있었다.
경찰이 두 번째로 방문한 날, 그녀는 자동으로 지배인에게 전화를 돌렸다.
“지배인님. 누가...... 찾아오셨습니다.”
“네. 곧 내려가겠습니다.”
지배인은 누구냐고 묻지 않았다.
수화기를 내리려던 순간, 프런트 대리석 위에 펼쳐진 서류가 눈에 들어왔다. 거기엔 분명 아는 이름 두 개가 나란히 있었다.
사건 피의자.
고소인.
그리고 준강간.
그녀는 여러번 눈을 깜빡였다.
“네. CCTV요. 지난 번 놓친 부분이 있어서 다시 한번 확인하고 들어가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젊은 경찰이 돌아서며 서류 파일을 접었다.
“누나.”
“응?”
“계란을 깜빡했어.”
일평생 들어본 적 없는 재즈 음악이 1시간 동안 혼자 울리다 멈췄다. 그녀는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지금 계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홍은 벌써 신발을 신고 있었다. 그가 계란까지 사 와서 만든 저녁밥은 먹는 둥 마는 둥, 그녀는 캔맥주를 여러 개째 따고 있었다. 밥을 깨끗이 비운 그가 맥주를 꺼내며 말했다.
“누나, 오징어 땅콩은?”
그녀는 말없이 냉장고를 가리켰다.
시집은 이미 프라이팬 아래 깔려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