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나’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아니, 그가 웃으면 더 크게 따라 웃으며 누나 소리에 신바람이 났다.
어젯밤 와인 한 병을 다 비운 탓인지 아직 숙취가 남아 있었지만, 심장은 어제보다 훨씬 바빴다.
그녀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오른쪽 눈은 라이터를, 왼쪽 눈은 그 남자를 보고 있었다. 여자의 라이터는 두 번 꺼졌고 세 번째엔 손가락까지 같이 떨렸다.
“누나, 집이 여기야?”
그가 담배를 꺼내며 물었다. 그녀는 간신히 불붙인 담배를 아무렇지 않은 듯 내밀었다. 손은 여전히 떨렸다. 담배도 함께 떨고 있는 것 같았다. 남자의 얼굴이 그녀 손끝으로 다가올 땐 심장이 30년 전처럼 함부로 나대기 시작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아주머니 소리를 처음 들은 날 담배를 배웠는데, 심장은 아직도 철이 안 들었나 보다.
청명한 하늘이라고. 이런 5월 하늘을 좋아한다고. 누구나 사랑하는 게 하나쯤은 있지 않겠냐고. 나는 초록을 예찬한다고. 그녀의 오른쪽 눈이 하늘을, 왼쪽 눈이 남자를 보며 떠들고 있었다. 지금 자기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때 남자 바지에 달라붙은 담뱃재가 눈에 들어왔다. 그녀는 별생각 없이 남자의 바지를 툭 털려다가 슬그머니 손을 거두며 엉뚱한 말을 던졌다.
“멍게 알지?”
“먹는 거?”
태어날 때부터 웃으며 나왔을 것 같은 환한 얼굴이 그녀를 바라봤다. 이 잘생긴 얼굴과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신기했다. 그런데 하필 멍게라니.
“떠돌다가 바위 찾으면 거기 붙어서 자기 뇌부터 먹어 치우는 멍게 말이야.”
“내가 멍게 먹어? 언제?”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봤다. 무슨 말부터 고쳐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뭐....필요 없으니까.”
그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웃었다. 그녀도 웃었다. 이 대화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근데 나, 바위 안 찾으려고.”
땅바닥에 내려놓았던 그녀의 편의점 봉투가 바람에 흔들렸다. 캔맥주 두 개와 오징어 땅콩 한 봉지. 제주에 내려온 뒤 거의 매일 먹는 조합이었다.
“누나 멍게야?”
“아마.”
“멍게 맛있어.”
“.....”
“회, 초장”
“방금까지 내가 한 말 알아듣겠어?”
“.....”
담배 연기가 천천히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붙어버리면 끝이었다. 적어도 그녀는 그렇게 믿고 싶었다.
어쩌면 그녀는 자유를 원했다기보다 붙어있을 능력이 없는 사람인지도 몰랐다.
제주에 오기 1년 전 그녀는 도시의 호텔에서 일했다. 금장과 대리석이 번쩍이던 곳이었다. 그때의 그녀는 그런 것들이 사람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생각해보면 전부 신기루 같은 것들이었다.
그곳엔 체리가 있었다. 카페 매니저였던 체리는 늘 지배인 옆에 있었다. 여자가 다가가면 둘의 대화는 끝났고, 체리의 눈웃음도 함께 멈췄다. 그런 장면이 몇 번 반복되자 그녀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가는 법을 배웠다.
5월 하늘이 쨍했다. 그 아래, 남자의 턱선이 매끈하게 반짝였다. 그녀는 화들짝 시선을 돌리며 담배 한 개비를 또 꺼냈다. 불이 안 붙었다. 다시 켰다. 또 안 붙었다. 에이 씨발. 병신같이 불도 못 붙이냐. 방금까지 멍게 이야기하던 인간이 자기 담배 하나 제대로 못 피우고 있었다.
그가 말없이 라이터를 켰다. 이번엔 그녀 얼굴이 그의 손끝에 닿을 듯했다. 염병할. 심장이 오늘따라 쓸데없이 성실했다.
체리는 지배인에게 자주 과일 스무디를 만들어 주었다. 한번은 지배인 재킷 실밥까지 떼어주는 걸 봤다. 그 가느다란 손가락이 포켓을 스치고 지나갈 때도 지배인은 웃고 있었다.
지배인은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 누구에게나 친절했고 누구보다 다정했다. 말보다 먼저 손발이, 태도가 그랬다.
새벽까지 남아 있는 직원에게는 말없이 커피를 내려 건넸고, 고객에게 욕을 먹은 날이면 퇴근하는 직원 뒤를 따라 나와 택시 문을 잡아주곤 했다.
그녀가 술취한 고객에게 모욕적인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를 때도, 지배인은 끝까지 고객 앞을 막아선 채 말했다.
“우리 직원에게 사과부터 하세요.”
그때 그녀가 믿었던 건 금장이나 대리석이 아니라, 어쩌면 더 단단한 사람 하나였는지도 몰랐다.
“누나, 짜장면 안 좋아하지?”
“어, 어떻게 알았어?”
“늘 남기잖아.”
바람이 불었다. 담배 연기가 이번에도 남자 쪽으로 흘렀다. 그가 연기를 뱉으며 고개를 숙였다. 눈썹이 짙었다. 입매는....그녀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체리가 더 이상 프런트 대리석에 기대지 않게 된 건 그날 밤 이후였다.
그 밤 이후 체리는 일주일간 출근하지 않았고, 지배인에게 주던 스무디도 더 이상 만들지 않았다. 지배인은 한동안 수척해 보였지만, 예전보다 더 다정해졌고 직원들은 더욱 조용해졌다.
모두의 피부에 닿았지만, 누구도 그것을 날숨으로 뱉지 않았던 그 밤의 공기가 도시 전체에 퍼지고 있었다. 그녀만 가끔 퇴근 후 집으로 돌아와 바카라상 위 와인병을 바라보곤 했다.
꼭 무슨 진실이라도 그 안에 남아 있는 것처럼.
제주에 내려오면서도 그 와인병을 가져왔다. 그리고 어젯밤. 결국 다 마셔버렸다. 그럼 끝난 거 아닌가. 버리면 되는 기억, 왜 여기까지 붙들고 왔을까.
그러다, 그녀는 문득 궁금해졌다. 왜 먼저 다가가지 못했을까. 왜 먼저 묻지 않았을까.
“이름이 뭐예요?”
이번엔 존댓말이 나갔다.
그가 웃었다.
“사홍.”
사. 홍.
“혹시....”
그녀가 주저하다 끝내 물었다.
“국적이?”
그가 답했다.
“중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