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안돼 안돼 안돼

by사피엔


식사와 함께 소맥 한잔, 맥주 한 병을 마신 뒤였다. 집까지는 십 분 거리였지만, 대리운전을 부르자니 아까웠다. 차를 두고 택시를 타면? 머릿속으로 대리비와 택시비를 굴리고 있을 때 남자가 호탕하게 말했다.



“ 2차 가시죠. 맥주 마시러.”


“그래요. 저희 집 앞에 근사한 맥줏집 있어요.”


남자는 대리를 불러 자신의 차로 이동하자고 했다. 여자의 낡은 경차에는 탈 생각이 없다고 농담처럼 말했다. 그녀는 웃으며 제 차도 아직 굴러는 다녀요, 했다.


밥을 먹는 동안 남자 입에서는 밥알과 함께 여러 차례 돈자랑이 튀어나오곤 했다. 그녀는 남자의 입술에 묻은 밥알이 언제 떨어질지만 바라보며 돈 얘기를 흘려들었다.



맥주집은 이미 사람들로 가득했다. 야자수 아래 야외 테이블은 밤공기가 시원했다. 자리를 잡으려는데 남자가 옆에 같이 앉자고 했다. 그녀는 듣는 시늉도 하지 않았다.



남자의 생맥주 잔이 서너 번 교체됐다. 여자는 내일 설거지 알바에 지장 없는 정도만 마셨다. 고기를 든든히 먹어서인지 다행히 취기가 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여자의 시선은 자주 맞은편 테이블에서 웃고 있는 젊은 남자들에게 향했다.


“궁금한 게 있는데, 설거지는 날마다 해요? 하루 얼마 벌어요?”


남자는 시간당 20만 원을 줄 테니 자기 집 청소를 해주면 어떻겠냐고 제안을 했다. 집은 깨끗해서 손댈 데도 없고, 냉장고만 채워주면 된다고 했다. 그건 별도의 카드를 주겠다고도 했다.

그녀는 속에서 욕지기가 올라오는 걸 애써 누르며



“시간당 20은 말도 안 되게 많죠. 요즘 시급이 얼마인지 아세요?”


시급 만이천 원짜리 설거지 알바하던 손에, 남자는 시간당 이십만 원짜리 자기 집 열쇠를 건네려 했다. 그 뒤에 따라붙을 조건을 떠올리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남자가 웃을 때마다 입가에 달라붙은 튀김 부스러기가 위태롭게 흔들렸다. 여자는 말없이 안주 접시를 조금 더 멀리 밀어놓고 앞접시는 가슴께로 끌어당겼다.


“얼굴에 뭐 했어요?”


여자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남자가 물었다.

남자에겐 대화가 마찰로 번질 것 같으면 교묘히 방향을 틀어버리는 묘한 재주가 있었다.


“하긴 뭘 해요? 전 그 흔한 쌍꺼풀도 없는데”


“왜 안 했어요. 그 흔한 걸? 얼마 하지도 않잖아요.”


안돼.



그녀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남자의 시선이 계속해서 여자 얼굴 위에 머물러 있었다. 도파민은커녕 입에서 욕설이 터질 지경이었다. 한때는 어떤 이의 시선만으로도 몸이 달아오르던 시절이 있었다. 손끝 하나 닿지 않았는데도 심장이 뛰고, 먹지 않고도 배고픈 줄 몰랐고, 매 순간의 표정에 설렘이 묻어났던. 그런데 지금 그녀는, 저 남자의 얼굴을 접시째 밀어버리고 싶은 충동뿐이었다.


안돼. 욕하면 안 돼.


맥줏집 맞은편, 여자가 사는 오피스텔을 올려다보던 남자가 물었다.


“집 구경해도 돼요?”


여자는 소스라치듯 웃었다.


“내일 날 밝으면 저기 부동산 가서 집 보여달라고 해보세요. 아저씨 엄청 친절하세요.”


남자의 미간이 살짝 좁혀지는가 싶더니, 쯔쯔 혀 차는 소리가 났다.


“예전의 나였으면 다 해줬을 텐데... 아껴주고 싶네요.”



지랄하네. 여자는 맥주잔을 들어 천천히 입술에 가져다 댔다.



안돼. 박차고 일어나면 안 돼.



“나랑 연애할래요?”


남자 입에서 말이 다 나오기도 전에 그녀가 외쳤다.


"안돼 안돼 안돼."



"참 고루하다."



비아냥인지, 무심한 멸시인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그 단어를 뱉던 남자는 갑작스럽게 취기가 오르는가 싶더니 가까스로 콜택시를 불렀다.



남자가 치명상을 입은 폐잔병처럼 비틀거리며 택시 앞으로 다가갈 때 그녀는 말없이 어깨를 내주었다. 조금 허무하고, 조금 우스운 밤이었다.


“내일 저녁에 다시 만나요”


남자의 접힌 몸이 택시 안으로 겨우 밀려 들어가기 직전, 혀 꼬부라진 소리로 그가 던진 말이었다. 바람처럼 금세 흩어져버린.



그녀는 늦은 밤 캔맥주를 하나 더 땄다. 창문 밖에서는 취객들의 웃음소리와 욕설이 한참 뒤섞여 올라오고 있었다. 누군가는 사랑을 말했고, 누군가는 씨발새끼를 반복했다. 그녀는 창문을 닫고 커튼을 쳤다.

설렘이 사라진 자리엔 늘 환멸과 오해, 허무 같은 것들이 엉겨 붙었다. 진실 아닌 것들 역시 언제나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아슬아슬하게 존재했다.


그녀의 눈에 바카라상 위 와인병이 들어왔다. 순간, 잊고 있던 공기가 방 안 어딘가에서 천천히 되살아나는 것만 같았다. 체리가 와인병을 내밀던 그 밤의 공기.



그녀는 냉장고 문을 열다 말고 한참 동안 와인병만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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