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하마터면

by사피엔




그날 아침 그녀는 5천 원짜리 에어프라이어를 만 원에 팔고 기분이 좋아졌다.

우습게도, 요즘 그녀의 도파민은 그런 식으로 터졌다.

오래전엔 아마 사람이 있었을 것이다. 밤을 새우게 만들고, 눈을 뜨면 햇살보다 먼저 떠오르던 사람. 그렇게 그녀의 삶을 흔들어놓고도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사라진 사람.


까마득한 사랑의 잔해가 머릿속 어딘가에서 먼지처럼 날렸지만, 그녀는 이삿짐 싸는 일에만 몰두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녀는 최근 6개월마다 거처를 옮겼다. 방향도 정하지 않은 채 훌쩍 떠나는 삶. 오래 품어온 로망 하나를 드디어 실행에 옮기는 중이었다.


옷 박스를 힘주어 누른 뒤 테이프를 감고 있을 때였다.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아침에 에어프라이어를 사 간 남자였다. 그녀는 잠시 손을 멈춘 채 화면을 내려다봤다.


“길동무, 말동무 필요하시면 문자 주세요.”



남자는 중고거래 사이트 채팅창에 자신의 번호를 남겼다. 그녀는 피식 웃었다. 만원짜지 에어프라이어 하나 팔았을 뿐인데, 마치 프로포즈라도 받은 것처럼 뜬금없었다.

하마터면, 조금 설렐 뻔했다.



에어프라이어를 받아들며 선한 농부처럼 웃던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그녀는 또 한 번 피식 웃음이 터졌다. 남자의 눈은 시종일관 그녀에게 머물러 있었다. 돌아서기 아쉽다는 듯 몇 번이고 말을 붙이던 남자가 멀어지자, 그녀는 얼마 전 5천 원에 산 물건을 만 원에 되팔며 느꼈던 죄바카라감을 슬그머니 털어낼 수 있었다.


늦은 밤,

이삿짐 위에 소주를 올려놓고 마시던 그녀가 남자에게 문자를 했다.



“길동무...못하겠네요. 이제 떠나려고요.”



“얼마나 계셨어요?” 기다렸다는 듯 남자의 답이 즉각이었다.



“6개월”


“꽤 계셨네요. 저는 세 달 째있어요.”


남자는 안식년처럼 제주에 내려왔다고 했다. 사업을 하고 있었고, 한달의 절반은 서울에 간다고 했다.


“네. 그동안, 에어프라이어 없이 버티셨군요.”


편안한 대화가 순조롭게 이어졌다. 그녀는 짓궂은 농담과 야한 말을 은근히 섞어가며 대화를 주도했다. 자신에게도 이런 능숙한 말솜씨가 있었던가, 술이 술술 들어갔다.


대화는 생각보다 오래 이어졌다. 남자는 골프를 이야기했고, 그녀는 설거지 알바 이야기를 했다. 남자는 제주에 30평대 세컨하우스가 있다고 했고, 그녀는 이달 말에 원룸을 비워야 한다고 말했다.

이상하게도 둘은 말이 잘 통했다.

광고회사를 운영한다는 남자의 말투는 생각보다 수수했고, 그녀는 생각보다 유머러스했다.


“거친 말벗이나 해요, 우리”


남자의 말에 그녀는 빙그레 웃었다. 소주 한병이 거의 비워질 무렵, 그녀는 문득 생각했다.

떠나기 위해 짐을 정리하다가, 잠깐 붙잡히고 싶어졌다고.


숙취로 시작한 아침, 남자에게서 문자가 왔다. 밥을 먹자고 했다. 골프가 끝나면 저녁 여섯 시쯤 시간이 된다고 했다. 여자도 좋다고 했다. 오후엔 설거지 알바가 있다고, 끝나고 가겠다고 말했다.


이런 하루, 설거지하는 손이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끝나면 낯설고 설레는 만남이 있을 것이다. 선한 얼굴의 남자와 고기를 먹고, 술 한잔 기울일 생각에 그녀는 콧노래를 흥얼거리기도 했다. 그릇들이 마구 날아다녔다.



장소는 그녀가 검색한 흑돼지 집. 일을 마친 후 충분히 씻고 충분히 멋을 낼 시간이 있었다.

집을 나서기 전, 거울을 다시 들여다본 그녀는 잠시 자기 얼굴에 흠뻑 취했다. 직업 없는 여자치고는 꽤 괜찮았다. 눈빛도, 갸름한 턱선도, 날씬한 팔다리도. 제주에 올 때 캐리어에 넣어왔던 향수까지 찾아 뿌렸다. 거의 반년 만이었다.



잘 꾸며진 별장 같은 고깃집 주차장에 15년째 끌고 다니는 낡은 차를 세우는 데, 벤츠 한 대가 천천히 들어왔다. 그였다.

여자는 괜히 웃음이 났다. 묘하게 긴장도 됐다. 골프장에서 바로 온 듯 하얀 바지가 먼저 차 문 밖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남자가 내렸다.


여자는 잠시 멍해졌다. 농부처럼 선한 얼굴이 아니라, 그냥 농부였다.



뭐지. 남자의 아버지가 대신 나온 건가. 중고 거래 때 본 인상 좋은 호감형 남자는 그녀의 착시였을까.


앞에 앉아 고기를 먹는 남자의 팔이 유난히 짧아 보였다. 남자가 말을 할 때마다 씹던 밥알이 자꾸 입술 언저리에 붙었다 떨어졌고, 또다시 붙었다 떨어졌다.


그녀는 혼자서는 다녀본 적 없는 흑돼지 집에서 상추 두 장에 고기 두 점, 그리고 마늘과 고추까지 푸짐히 넣고 와구와구 쌈을 씹었다.



가끔 목구멍에 걸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덩달아 콧물도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