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몇 년 전 협력사 대표님 한 분과 처음 미팅을 했던 날이 떠오른다.
당시 그 브랜드는 홈쇼핑 채널에 처음 입점하고 싶어 했고, 나는 그 카테고리의 담당 MD였다.
미팅 내내 대표님의 태도는 한마디로 '간도 쓸개도 다 드리겠습니다' 그 자체였다.
요청하는 것은 뭐든 맞춰주겠다고 했고, 마진도 최대한 양보하겠다고 했고, 품질 개선도 우리가 원하는 방향으로 얼마든지 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론칭이 성사됐다.
첫 방송은 나쁘지 않게 마무리가 되었고, 그렇게 차츰 홈쇼핑에서 자리를 잡아갈 무렵이었다.
그런데 조금 자리를 잡는 모습이 보이자 대표님의 태도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상품 구성을 협의하는 자리에서 처음과는 전혀 다른 조건을 꺼냈고, 초기 약속하고 차일피일 미루어왔던 품질 개선 요청에 '다른 곳은 이 정도 품질이면 충분하다고 하던데'라는 황당한 답변이 돌아왔다.
'화장실 갈 때 마음 다르고, 나올 때 마음 다르다.'라는 말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여측이심(如廁二心).'
如(같을 여) 厠(뒷간 측) 二(두 이) 心(마음 심).
'화장실 갈 적 마음 다르고, 나올 적 마음 다르다'는 뜻으로, 간절히 바라는 일을 앞두고서는 성심성의를 다하지만 목표를 달성하고 난 뒤에는 당초의 절박함을 잊어버리는 인간의 심리를 꼬집는 말이다.
대동강 물도 팔았다던 봉이 김선달 이야기에 등장하는 말로, 한양을 구경하던 김선달이 갑자기 용변이 급해져 어느 대갓집 측간을 빌려 쓰기 위해 양반집 하인에게 석 냥을 건네며 애원했다가, 볼일을 마치자 돈을 받은 하인이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어 골탕을 먹이는 파렴치한 짓을 했다고 전해진다.
들어가기 전과 나온 후. 급하기 전과 급함이 해소된 후.
그 짧은 시간 사이에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나 달라진다.
비단, 작은 생리현상에도 이러한데 큰 이권이 오가는 거래라면 오죽할까.
기획자로 현장에서 16년간 일하면서 나는 '여측이심'의 장면을 수없이 목격했다.
협력사가 절실히 필요할 때는 상대방의 조건을 최대한 맞춰주겠다고 했다가 계약이 성사되고 나면 조금씩 기준이 달라지는 것.
프로젝트가 위기일 때는 팀원에게 '이것만 해결되면 뭐든 지원해주겠다'고 했다가 위기가 지나고 나면 그 약속이 흐릿해지는 것.
론칭이 급할 때는 고객의 의견 하나하나를 소중히 듣겠다고 했다가 론칭이 성공하고 나면 고객 게시판을 들여다보는 횟수가 줄어드는 것.
여측이심은 사실 나쁜 사람들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품고 있는 가장 솔직한 본성의 이름이다.
문제는 이 여측이심이 기획의 세계에선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이다.
브랜드의 신뢰는 화장실 들어가기 전의 말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화장실에서 나온 이후에도 처음 했던 그 약속을 지키는 것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진다.
고객은 기억한다. 처음 론칭 때 그 브랜드가 했던 약속을.
'고객의 목소리를 항상 경청하겠습니다.'
'품질에 절대 타협하지 않겠습니다.'
'고객이 만족하지 않으면 바카라임지겠습니다.'
그런데 브랜드가 안정되고, 매출이 올라가고, 시장에서 자리를 잡기 시작하면 그 약속들이 하나씩 희미해진다.
고객은 그 변화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또 분노한다.
홈쇼핑 현장에서 나는 이 여측이심의 결말을 여러 번 목격했다.
처음 입점 당시에는 상품 하나하나에 혼을 담던 브랜드가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변한다.
원가를 낮추기 위해 소재를 슬쩍 바꾸는가 하면, 처음에는 작은 고객의 불만에도 호들갑을 떨며 버선발로 대응하던 응대가 점점 느려진다.
이유는 명확하다. 처음만큼 절박하지 않으니까.
이 뿐만이 아니다. 상품 설명의 디테일이 줄어든다. 그러면서 '어차피 팔리니까'라며 자기 합리화를 시전한다.
하지만 고객의 재구매율은 서서히 떨어지기 시작하고, 리뷰의 온도 역시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왜 갑자기 반응이 식었지?'라며 의외라는 듯 뒤늦게 반응하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갑자기 일어난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소 씁쓸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일들을 여러 번 겪으며 생긴 나만의 루틴이 있다.
첫째, 화장실 들어가기 전의 말을 기록해두는 것이다.
단순히 분쟁시 증거 수집을 위한 기록을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이 절박했던 순간에 했던 약속, 간절했던 시절에 품었던 다짐들을 기록하는 것이다.
기록해두지 않으면 사람들은 처음의 그 마음을 자연스럽게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나는 새로운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짧은 메모 하나를 남겨두는 버릇이 있다.
'이 기획을 왜 시작했는가.'
'이 고객에게 무엇을 약속했는가.'
'이 브랜드를 고객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이유는 무엇인가.'
프로젝트가 잘 풀릴수록, 시간이 지날수록, '어차피 되고 있으니까'라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올 때 이 메모들이 나를 붙잡는 닻이 되어 준다.
둘째, 화장실 나온 후의 태도로 그 사람을 판단한다.
협력사를 고를 때, 함께 일할 사람을 고를 때 나는 한 가지를 유심히 본다.
그들이 무언가를 간절히 원할 때의 모습이 아니라, 그 간절함이 해소된 다음의 모습.
'계약 후에 어떻게 연락하는지.'
'성공한 후에 어떻게 행동하는지.'
'급하지 않을 때 어떤 태도를 유지하는지.'
그래서 급할 때 했던 말을 믿기보단, 급한 일이 해결된 후 보이는 행동을 유심히 관찰한다.
화장실에서 나온 후의 모습이 그 사람의 진짜 모습이기 때문이다.
'The danger past, God forgotten.'
(위기를 모면하면 하느님을 잊는다.)
상대방 개개인의 태도를 문제삼기 전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인간의 본성은 같다는 인식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급할 때는 하늘도 부르고, 고객도 왕이고, 파트너도 소중하다.
하지만 급함이 해소되는 순간 그 마음은 조용히 식기 시작하는 건 어쩌면 자연스러운 인간의 본성이다.
때문에 이 본성을 이기는 솔루션으로 '개인의 의지력' 따위를 운운하는 것은 위험하다.
화장실 들어가기 전에 했던 말을 나올 때도 들을 수 있는 구조를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고객의 목소리를 정기적으로 확인하는 루틴.
초심을 기록해두는 메모 한 줄.
'왜 이 기획을 시작했는가'를 주기적으로 꺼내 읽는 습관.
이것들이야말로 '여측이심'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이기는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 아닐까 싶다.
그 협력사 대표님과는 결국 두 번째 시즌을 끝으로 계약이 종료됐다.
나중에 다른 경로로 들었는데, 해당 브랜드는 몇 군데 경쟁 채널을 전전하다가 결국 시장에서 조용히 사라졌다고 했다.
기획자로 오래 살다 보면 한 가지 진실과 마주치게 된다.
시장에서 오래 살아남는 브랜드는 가장 혁신적인 브랜드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처음의 절박함을 잊지 않는 브랜드가 살아남는다.
첫 고객을 대하던 태도를 백만 번째 고객에게도 유지하는 브랜드가 살아남는다.
그것이 고객과의 신뢰고, 그 신뢰야말로 가장 긴 시간을 버티는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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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딘가에서 새로운 계약을 앞두고 절박하게 미팅을 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꼭 한가지만 부탁드리고 싶은 말이 있다.
'지금 이 마음을 어딘가에 적어두세요.'
절박함이 사라진 후에도 그 메모를 꺼내 읽을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