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얼마 전 팀에서 신상품 발표회가 있었다.
발표자는 팀에서 가장 꼼꼼하기로 소문난 기획자였다.
준비한 자료는 딱히 흠잡을 데가 없었다. 시장 분석, 경쟁사 비교, 소비자 인사이트, 가격 전략. 논리의 빈틈이 없었고, 제시도니 숫자는 탄탄했다. 그런데 발표가 끝나고 회의실에 흐른 것은 박수도, 탄성도 아닌 묘한 침묵이었다. 발표가 끝나고 임원 한 분이 짤막한 평을 했다.
'나름 시장분석도 열심히 준비한 것 같고, 상품 기획 의도와 논거도 훌륭한 것 같은데, 뭔가 확 사로잡는 한방이 없네요.'
회의실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흠 잡을데 없는 기획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왜 이처럼 미지근한 반응을 이끌어낸 것일까?
기획자의 필수 역량 중 하나가 바로 '발표력(Presentation Skill)'이다.
기획은 크게 3단계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
1.내용의 구성(Planning)
2.문서화(Making)
3.발표(Presentation)
3단계 중 마지막에 해당하는 '발표'는 기획의 완성도를 결정짓는 필수 요소다.
기획자의 핵심역량 중 발표력이 중요한 이유도 이 같은 맥락에서다. 기획의 최종 목적이 '설득'과 '실행'에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기획안이라고 하더라도 발표를 통해 이해관계자들을 설득하지 못하면 기획은 실행되지 못하고 사장된다. 때문에 아무리 좋은 기획안을 구성하고 만들어내는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발표를 망친 기획자는 빛이 나기 어렵다.
여기서 발표를 잘 한다는 것은 단순히 말을 잘하고 화려한 언변을 가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논리적 근거 없이 감정에만 호소하는 화려한 언변은 일시적인 감흥을 줄 수는 있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청중의 의문만 증폭시켜 최종적인 의사결정(설득)을 이끌어내지 못하긴 매일반이다.
탄탄한 논리와 논거들이 나열되었지만, 단순히 고개만 끄덕여지는 발표가 있다.
논리와 논거는 다소 부족하지만, 와~ 하며 가슴이 먼저 반응하는 발표가 있다.
앞에 소개한 신상품 발표회의 사례는 너무 논리적으로 접근한 나머지 극적인 요소가 결여되는 경우 흔히 나타나는 청자의 반응이라 할 수 있다.
신입 시절, 나는 기획서가 '정보의 나열'이라 믿었다. 시장 분석, 타겟 설정, 기대 효과 등등 칸을 채우듯 데이터를 쏟아부으면 당연히 설득이라는 결과가 따라올 것이라 믿었던 것 같다. 하지만 현장에서 산전수전을 겪으며 깨달은 것이 하나 있다. 훌륭한 발표는 정보의 집합체가 아니라, 읽는 이의 마음을 쥐락펴락하는 정교한 '드라마트루기(Dramaturgy, 극작술)'의 결과물이라는 사실이다.
'드라마트루기(Dramaturgy)'
독일어 'Dramaturgie'에서 온 말로, 연극에서 극의 구조와 서사를 설계하는 기술을 뜻한다. 단순히 이야기를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감정적으로 몰입하고 움직이도록 이야기의 흐름과 긴장감을 의도적으로 설계하는 기법을 말한다.
나는 현장에서 수 많은 기획자들의 발표를 목격했다. 때로는 스스로가 발표자가 되어 수 많은 무대에 올라보기도 했다. 그 과정속에서 항상 한 가지 궁금증에 다다랐다.
청중의 감동을 이끌어내는 발표와 그렇지 않은 발표의 결정적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이 차이를 결정짓는 요소로 '드라마트루기(극작술)'의 유무를 꼽는다.
드라마트루기는 연극의 언어다. 하지만 이것은 기획의 언어와 본질적으로 유사하다.
상품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품을 둘러싼 이야기를 설계하는 것.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이 아니라, 데이터가 흘러가는 서사의 흐름을 짜는 것.
보고서를 쓰는 것이 아니라, 보고서를 읽는 사람의 감정 여정을 설계하는 것.
이처럼 연극의 서사를 설계하는 것과 기획의 서사를 설계하는 것은 닮아있다.
하지만 많은 기획자들이 드라마트루기라는 개념을 모른 채 기획을 한다.
기획자가 드라마트루기를 이해한다는 것은 구체적으로 어떤 의미일까?
세 가지 장면을 예시로 설명해보자.
첫째, 첫 장면이 전부다
연극 연출에서 가장 중요한 씬은 첫 장면이다.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첫 시작 5분이다.
관객이 무대에 몰입할지 말지는 처음 5분에 의해 결정된다는 의미로 연극 영화 연출에 있어 교과서처럼 등장하는 말이다.
기획 보고도 마찬가지다. 첫 슬라이드, 첫 문장, 첫 숫자. 그것이 이후 모든 이야기의 온도를 결정한다.
'오늘 발표할 상품의 시장 규모는 약 2조 원입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과,
'지난달 저는 이 상품의 타깃 고객이 사는 동네를 직접 돌아봤습니다.'
이렇게 시작하는 것은 같은 내용을 담고 있어도 전혀 다른 무대를 만든다.
데이터로 시작하면 머리를 열고, 이야기로 시작하면 가슴을 연다.
무엇을 선택하는가는 본인의 선택이지만, 첫 장면에 힘을 실어야 한다는 사실만은 변함이 없다.
둘째, 긴장과 이완의 리듬을 설계하라
좋은 연극은 긴장과 이완이 반복된다. 클라이맥스만 계속되는 연극은 오히려 감동이 없다.
기획 보고도 마찬가지다. 숫자와 논리만 이어지는 보고는 청중을 지치게 만든다.
긴장을 만들고, 그 긴장을 잠깐 풀어주고, 다시 더 깊은 긴장으로 끌어당기는 리듬을 설계해야 한다.
'문제 제기 → 공감 형성 → 반전 → 해법 제시 → 비전 제시'
이 흐름은 단순한 보고의 순서가 아니라, 감정의 여정을 설계하는 드라마트루기의 문법이다.
셋째, 무대 뒷편을 관리하라
연극에서 무대 뒤(Back Stage)가 중요하듯 기획에서도 뒷단 관리가 중요하다.
고객이 보는 것은 무대 위다. 상품의 디자인, 패키지, 광고, 상세페이지 등이 이에 해당한다.
하지만 그 무대 위를 빛나게 만드는 것은 무대 뒤의 집요함이다.
원단 하나를 고르기 위해 공장을 열 번 방문하는 집요함, 카피 한 줄을 위해 밤을 지새운 시간들, 패키지 컬러 하나를 위해 수십 번 시안을 뒤집은 노력들이 모여 훌륭한 무대를 만든다.
물론 고객은 이 과정을 다 보진 못한다. 하지만 그 무대를 위해 준비한 집요한 노력들과 연습들은 무대 위에서 '왠지 모를 감동'으로 발현되기 마련이다.
드라마트루기를 아는 기획자일수록 무대 위만큼 무대 뒤를 소중히 여긴다.
연극 연출 기법의 관점에서 구체적으로 기획에 접목해 볼 수 있는 것들은 뭐가 있을까?
1.갈등과 결핍 : 극적 도입(Inciting Incident)
모든 명작 희곡은 '결핍'에서 시작한다. 햄릿의 고뇌도, 로미오와 줄 줄리엣의 비극도 해결되지 않은 갈등이 동력이다. 기획서도 마찬가지다. 단순히 '이런 상품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은 지루한 설명문에 불과하다. 진정한 드라마트루기는 고객이 처한 '현실의 결핍'을 극적으로 드러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극적인 도입'이 날카로울수록 관객(결정권자나 고객)은 다음 장을 넘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된다.
2.복선과 빌드업 : 개연성의 미학
연극에서 1막에 벽에 걸린 총이 나왔다면, 3막에서는 그 총이 발사되는 장면이 등장할 확률이 크다. 아니 발사되어야 한다. 이를 연극 연출에선 '복선'이라고 한다.
기획안도 마찬가지다. 서두에 데이터와 시장 조사는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결론을 향한 '복선'이어야 한다. 기획안에 등장하는 모든 자료와 논거들은 결론을 향해 치밀하게 계산된 빌드업의 과정이어야 한다. 논리의 비약 없이, 마치 운명처럼 '그러므로 이 기획이 정답일 수밖에 없다'는 카타르시스에 도달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기획자가 발휘해야 할 극작술의 핵심이다.
3.페르소나와 대사 : 고객의 목소리를 빌려라
드라마트루기에서 캐릭터의 일관성은 생명과도 같다. 기획자가 설정한 '페르소나'는 종이 위의 가상 인물이 아니라, 실제로 무대 위에서 살아 움직이며 대사를 뱉는 배우여야 한다.
'30대 온라인 게임인'이라는 밋밋한 설정 대신, '새벽 배송된 레몬즙의 인쇄 오류를 보고 실망했지만, 정성 어린 스티커 한 장에 마음을 돌린 고객'처럼 구체적인 대상을 상상해야 한다. 기획서의 문장은 기획자의 독백이 아니라, 그 페르소나가 간절히 듣고 싶어 했던 '대사'여야 한다.
4.커튼콜 : 기획 그 이상의 여운
막이 내리고 조명이 꺼진 뒤에도 관객의 마음속에 잔상이 남는다면 그 연극은 성공한 것이다.
기획서의 마지막 페이지는 단순히 '예산안'으로 끝나서는 안 된다. 이 기획이 실행되었을 때 변화될 세상의 풍경, 고객의 달라진 눈빛을 상상하게 만드는 '여운'이 있어야 한다.
기획자는 단순히 보고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누군가의 삶에 새로운 막을 올려주는 연출가이기 때문이다.
좋은 기획은 좋은 연극을 닮아있다.
시작이 있고, 갈등이 있고, 반전이 있고, 결말이 있다.
그렇기에 나는 오늘도 모니터라는 빈 무대를 바라보며 드라마트루기를 고민한다.
숫자라는 배우들을 어디에 배치할 것인가.
어떤 문장으로 관객의 심박수를 높일 것인가.
.
.
.
기획서라는 희곡이 완벽할 때,
비로소 비즈니스라는 거대한 연극이 매진 사례를 기록할 수 있을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