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소한 일상의 경험을 비즈니스 인사이트로 바꾸는 매일의 기록'
'AI 때문에 몇 년 후면 네 일이 없어질지도 몰라. 정신 똑바로 차려!'
다름 아닌 오늘 점심시간에 옆테이블에 오고 가던 대화 중 내 귀를 사로잡는 한 문장이었다.
엿들으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는데, 그 한 마디가 내 귀에 꽂혔다.
요즘 기획자들 사이에서 자주 오가는 말이 있다.
'요즘 AI 쓰면 기획서 초안 뽑는 데 30분도 안 걸려.'
'챗GPT 덕분에 리서치 시간이 반으로 줄었어.'
'예전에 며칠 걸리던 시장분석을 단 몇 시간 만에 끝냈어.'
'이번 기획전 카피 AI가 한방에 해결해 줬어.'
틀린 말이 아니다. 실제로 나도 체감하고 있다. AI가 등장하면서 기획자의 단순 반복 작업은 눈에 띄게 빨라졌고, 가벼워진 게 맞다.
그렇다면 자연스럽게 이런 기대가 따라온다.
'기획자들이 드디어 더 창의적인 일에 집중할 수 있게 되겠다.'
'잡무가 줄어드니, 진짜 중요한 고민을 더 깊게 할 수 있겠다.'
과연 정말 그럴까.
나는 160년 전 영국의 한 경제학자가 던진 질문을 떠올려본다.
'제본스의 역설(Jevons Paradox)'
1865년, 영국의 경제학자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가 그의 저서 '석탄 문제(The Coal Question)'에서 처음 제기한 개념이다.
당시 영국은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 개량으로 석탄 효율이 획기적으로 높아지는 이른바 '기술혁신의 시대'를 맞는다. 같은 양의 석탄으로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당연히 석탄 소비가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가 팽배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정반대의 일이 벌어졌다.
효율이 올라가자 증기기관을 쓰는 산업과 기계의 수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결국 영국 전체의 석탄 소비량은 오히려 이전보다 훨씬 급증했다.
제본스는 이 현상을 이렇게 정리했다.
'어떤 자원의 사용 효율이 높아질수록, 그 자원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 증가한다.'
효율이 소비를 줄이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소비를 폭발적으로 늘린다는 역설.
헌데 160년이 지난 현시대에 제본스의 역설은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반복되고 있다.
'증기기관'에서 'AI'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AI가 기획자의 업무 효율을 높여준 것은 사실이다.
초안 작성, 데이터 정리, 경쟁사 분석, 카피 시안. 예전에는 며칠씩 걸리던 작업들이 이제는 몇 시간, 혹은 몇십 분으로 압축되었다.
그렇다면 그 절약된 시간으로 기획자들이 더 깊은 사유를 하게 되었을까?
현장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오히려 이런 풍경이 더 자주 눈에 띈다.
기획서 초안이 빨라지니, 요청되는 기획서의 수가 늘어난다.
리서치가 쉬워지니, 더 고도화된 리서치가 당연한 것처럼 요구된다.
시안이 빠르게 나오니, 비교할 시안의 수가 늘어났다.
AI가 기획자의 짐을 덜어준 것이 아니라, AI가 기획자에게 요구되는 산출물의 기준과 양을 동시에 끌어올린 것이다. 제본스가 160년 전 목격한 바로 그 장면이, 현시대 기획자의 바카라상 위에서 그대로 재연되고 있는 것이다.
좀 더 솔직해져 볼까?
더 불편한 진실은 또 있다.
AI가 빠르게 뽑아주는 기획서 초안에 기획자 스스로가 점점 익숙해지고 있다는 것이다.
처음엔 'AI가 초안을 잡아주면 내가 깊게 다듬으면 되겠지'라는 생각으로 AI에게 일을 맡길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작업이 반복되다 보면 어느 순간 AI가 만든 구조에 살을 붙이는 작업이 기획의 전부인 양 익숙해지고, 스스로 백지 앞에 앉아 '왜 이 기획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을 던지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게 된다.
이른바 AI가 큰 방향을 잡아주면, 기획자가 이를 받아 세부적인 부분들을 마무리하는 주객이 전도되는 상황이 연출되는 것이다. 이는 똘똘한 조수가 수술의 방향과 메인 수술을 담당하고, 정작 담당 교수는 뒤처리만 하는 역설적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효율이 높아진 자리가 '기획자의 사유'로 채워진 것이 아니라, 더 많은 산출물을 향한 압박으로 채워진 것이다.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은 기획안이 넘쳐나는 역설적 상황.
기획의 시간은 절약되었을지 모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기획의 깊이는 오히려 더 얕아질 위험에 직면해 있다.
이것이 AI 시대 기획자라는 업을 가진 사람들이 마주하게 된 '제본스의 역설'이다.
이 사실을 처음 깨달았을 때, 나는 뒤통수를 세게 한 방 얻어맞은 느낌이 들어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그렇다면 이 역설적 시대에 기획자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할까?
나는 다음의 두 가지를 생각한다.
첫째, 시간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효율화로 생긴 시간의 여백은 저절로 사유의 공간이 되지 않는다. 누군가 혹은 무언가가 반드시 그 자리를 채우려 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더 많은 산출물로 채우는 기획자는 S급은 못되더라도 적어도 A급 기획자라는 소리라도 듣는다. 하지만, 시간의 여백을 말 그대로 여백으로 놔두는 기획자는 B급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더 불편한 진실은 'AI' 따위는 남 일이라며 기술의 발전 자체를 애써 외면하는 이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C급 기획자가 아니라 서두에 언급했던 대화처럼 역사 속으로 사라질 기획자다.
AI 덕분에 하루 한 시간의 여유가 생겼다면, 그 시간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기획자 스스로가 먼저 정해야 한다. 무엇을 할지 정하지 못하겠다면, 무엇을 하면 좋을지 이 문제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해야 한다. 그런 시간들이야말로 AI가 절대 대신해 줄 수 없는 기획자 고유의 영역이다.
AI시대에 진짜 효율이란 단순히 같은 일을 더 빠르게 하는 것이 아니다.
절약된 자원을 더 중요한 곳으로 옮기는 것이다.
더 중요한 일을 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드는 것이다.
둘째, 효율보다는 본질을 물어라
답을 찾는 능력은 아무리 뛰어난 기획자도 AI를 이길 수 없다. 지금은 그런 시대다. 인정할 건 확실히 인정하는 것이 정신건강에 이롭다.
하지만 좋은 질문을 만드는 것은 여전히 사람의 몫이다.
'이 상품은 왜 존재해야 하지?'
'이 고객이 말하고 싶은 것은 뭐지?'
'이 숫자 이면에 숨어있는 보이지 않는 맥락은 뭘까?'
이런 질문들은 데이터를 아무리 빠르게 처리해도 AI가 스스로 던질 수 없는 것들이다.
기획자의 가치는 AI보다 빠르게 초안을 쓰는 데 있지 않다. 오히려 AI가 만든 초안 너머의 본질을 끝까지 붙잡고 놓지 않는 집요함에 있다.
'더 쉽게, 더 빠르게, 더 편하게'를 설계하는 것이 단순히 고객 편의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소비 행동 자체를 재설계하는 일임을 이해하는 기획자는 제본스의 역설을 자신만의 무기로 쓸 수 있다.
제본스가 살던 시대의 사람들은 증기기관이 효율화되면 드디어 일이 줄어들 것이라 믿었다.
하지만 효율의 끝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더 많은 일, 더 큰 산업, 더 폭발적인 소비가 기다리고 있었다.
AI 시대를 맞이한 현시점에서 사람들은 160년 전과 똑같은 기로에 서 있다.
AI 덕분에 일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AI 덕분에 더 많은 것이 요구되는 세상으로 우리는 이미 진입하고 있다.
그러한 세상에서
AI를 잘 다루지 못하는 기획자는 B급 기획자로 전락할 것이다.
그리고 AI를 가장 잘 다루는 사람이 A급 기획자 대우를 받을 것이다.
하지만 S급 기획자는 AI가 채울 수 없는 자리를 끝까지 지키는 사람의 몫이 될 것이다.
제본스는 160년 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효율의 끝에는 절약이 아니라, 더 큰 욕망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기술의 진보는 자원의 절약이 아니라, 자원을 더 많이 쓸 수 있는 새로운 이유를 만들어낸다.'
- 윌리엄 스탠리 제본스(William Stanley Jevons)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