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사 용품이 트럭에 실려 집으로 왔다, 그 후

K며느리의 지나간 제사 열전

by송주

아주 오랜 전, 결혼을 위한 상견례 자리였다. 그 날의 냉랭한 분위기를 생각하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내 등골에 땀이 고이는 것 같다. 시어머니는 말씀하셨다.

"우리 애가 장남에 장손이니 제기 세트를 혼수로 해 왔음 좋겠습니다."

제기 세트를 혼수로 해 오란 말에 친정 엄마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와 내게 말씀 하셨다.

"아무래도 제사를 빨리 넘겨 줄려고 그러나 보다."

그때 이미 내 운명을 어림짐작으로 예상했다. 하지만 사랑에 눈이 먼 그때 제기 세트 따위가 내 결혼에 장애물이 될 수 없었다.


사실 결혼 전에는 제사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 하지만 결혼 후 제사는 나를 죄여 오는 족쇄가 되었다.


결혼과 함께 시작된 낯선 제사


8남매의 둘째 며느리였던 친정 엄마는 멀리 사는 큰집을 대신해 수많은 시댁 대소사를 손수 맡으셨다. 시댁의 일이란 일은 안 해 본 것이 없을 정도였던 엄마는 내게 제사에 대해 아무것도 가르쳐 주지 않으셨다. 엄마는 내가 본인처럼 고생할까 봐 두려우셨던 것 같다. 그랬기에 나는 제사에 관해 할 줄 아는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다. 내게 명절은 그저 먹고 즐기는 즐거운 날이었다.



결혼 후 시아버님이 내게 작은 종이 한 장을 건네셨다. 명절 외에 지내는 제사 날짜가 적힌 종이였다. 아들에게도 건네지 않던 그 날짜를 며느리에게 손수 전해 주셨던 것이다. 그때부터 나는 시댁의 제사 문화를 배워야만 했다.

어머니의 가르침 아래 지내는 제사는 여자의 손에서 시작해 여자의 손으로 마무리되는 모순의 집약체였다. 나는 일면식도 없는 시댁 조상님의 제사 준비를 여자들만 해야 하는 상황이 부당하다고 생각했지만, 묵묵히 배워 나갔다.

시어머니가 시키는 대로 생선을 다듬고, 전에 밀가루를 묻혀 구워냈다. 제기에 음식은 홀수로 가득 채워 담았다. 나물도 과일도 종류를 홀수에 맞춰 준비하라고 하셨다. 며느리가 제사에 토를 달았다가는 가정의 평화가 깨질 것 같았다.

남편이 제사에 오지 못하면 혼자서라도 오라는 시어머니의 말을 따랐고, 그렇게 제사에 손을 보탰다. 그리고 몇 년 후, 도를 닦은 수행자가 하산을 명받듯 나는 제사를 물려받았다.


가을의 어느 날, 제사 용품이 트럭에 실려 우리 집으로 왔다. 나는 철없이 설레기도 했다. 이제 제사나 명절 때마다 시댁에 가는 불편한 여정을 그만할 수 있겠구나 싶었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헛다리를 짚었다. 나 혼자 오롯이 준비하는 첫 제사가 다가왔다.


제사는 준비 과정부터 진을 빼는 노동이었다. 제삿날이 되기 며칠 전이면 시간을 내어 제수용 생선을 먼저 사서 다듬고 씻어 말렸다. 제사용 떡을 미리 주문해 놓는 것도 잊지 않아야 했다.


그리고 제사 전날이면 큰 캐리어에 제사 음식 재료들을 가득 담아 집으로 날랐다. 장을 보는 날에는 남편이 반차를 내고 함께했다. 하지만 남편이 할 수 있는 일은 제사 음식들을 집까지 올려다 놓는 것까지였다.



IE003673539_STD.jpg


사 온 음식들을 씻고 다듬는 일은 모두 내 몫이었다. 음식 재료를 장만하는 일련의 과정은 직접 해 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알 수 없을 만큼 손이 많이 갔다. 온라인 게임을 다니며 제사까지 준비해야 했던 그때, 친정 엄마의 고생도 만만치 않았다. 어린아이 둘을 키우며 슬롯생활을 하는 딸이 안쓰러워 시댁 제사 음식을 친정 엄마가 해 주시고 가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곤 했다.


큰 팬에 기름을 두르고 노릇하게 구워 내는 생선 대가리는 어찌 그리 잘 떨어지는지, 상에 올리기 전에 이쑤시개로 고정하는 것도 일이었다. 도라지는 식초를 넣어도 쓰고, 팍팍 문질러 씻어도 쓴맛이 가시질 않아 곤란했다. 과일은 또 왜 그리 무거운지, 바나나에 붙은 스티커는 또 왜 그리 많은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웠다. 너무 힘들어 조상님 제삿날이 내 제삿날이 될 지경이었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제사상을 차려 놓으면 남자들은 절을 했다. 그 후 급하게 밥을 차려 냈다. 두꺼운 수육은 오래 삶아도 막상 먹기 직전 썰면 피가 살짝 비쳤다. 그럴 때면 어른들 눈치를 보며 침이 꿀꺽 삼켜지곤 했다.


초장, 기름장, 쌈장까지 식사를 위해 준비해야 하는 것도 많고 많았다. 제사를 지내는 동안 따뜻했던 음식들은 어느새 모두 식어 맛이 없어졌고, 남는 것은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와 음식물 쓰레기였다.


제기를 닦아 넣고 설거지와 분리수거까지 끝낸 후 새벽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가는 그 기분을 말로 표현해 무엇하랴. 제사는 결국 남편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게 만드는 행사가 되었다. 육아와 일로 너무나 바쁘던 30대의 나는 제사의 늪에 빠져 그때마다 힘겨워했다.



시어머니도 둥그러지셨다


명절이면 기름 냄새가 손에 배었고, 일을 다 끝내고 나면 손가락 마디가 뻣뻣했다. 그렇게 8년이 흘렀다. 시댁이 시골에 터를 잡으면서 제사는 배구공이 토스되듯 다시 시댁으로 넘어갔다.


뿌리 깊은 유교 문화를 지닌 우리나라는 제사를 아주 중요하게 여겼다. 제사는 가문의 건재함을 보여주는 도구로 자리매김하기도 했다. 아주 오랜 세월 동안 숭고한 조상의 뜻을 기린다는 명목 아래 제사는 중요한 문화가 되었다.


하지만 현대 슬롯에 이르러 제사로 인한 갈등도 적지 않게 생겨났다. 성별에 따른 역할 불균형으로 불화가 생기기도 했고, '명절 증후군'이라는 신조어까지 등장했다.

"조상복 있는 사람은 공항에 가 있고 반대인 사람은 제사 지내다 싸움이 난다."

제사는 어느새 이런 조롱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 후 제사는 점점 간소화되기 시작했고, 각 가정의 사정에 맞춰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변했다. 이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 가정도 많아진 듯하다.


올해도 어김없이 명절이 돌아온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명절이 부담스럽지 않다. 몇 년 전 명절 차례가 없어졌고, 기제사 역시 한 번으로 줄었다. 특히 이번 명절에는 시댁에 가지 않기로 했다.


"차도 밀리고 바쁜데 이번 명절에는 쉬어라. 제사도 없는데... 배추 알 차면 김치 담가 놓을 테니 그때 내려와라."


작은 밭농사를 지으시는 시어머니는 내게 배추 알이 찰 때쯤 오라고 하셨다. 차례를 없애고 제사를 줄이니 마음의 여유가 생긴 시어머니도 둥그러지셨다. 당연히 나도 시어머니가 덜 무섭고 덜 어려워졌다. 제사나 차례 때마다 일손을 보태는 노동력의 불균형 때문에 눈치를 보거나 미안해하는 일도 없어졌다. 당연히 시댁으로 가는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다 먹지도 못할 많은 음식을 사는 데 드는 비용이 절감되면서 배달 음식을 시키고 맛있는 것을 사 먹는다. 며느리들도 명절을 즐길 수 있게 됐다. 나도 이제 명절에 아메리카노 한 잔을 여유 있게 마실 수 있는 K며느리가 되었다.


https://omn.kr/2jtta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누군가의 도움 없이 노년을 지낼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