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축제에 아줌마가 떴다.

골병 청구서를 받았지만 축제는 즐거웠다.

by송주

지난 5월 26일부터 28일까지 모교인 울산대학교에서 축제가 열렸다. 울산대 축제는 문수 대동제라는 이름으로 매해 열린다. 나는 2003년 졸업 이후 대학교 축제에 가본 적이 없다. 대학 축제 기간을 잊을 정도로 사는 게 바빠질 줄은 미처 몰랐다. 50이 다 된 올해, 친구들과 함께 잊고 살았던 대학 축제에 다시 가게 되었다.

나와 친구들은 모두 같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동창이다. 대학에 와서 다시 친해져 함께 야구 동아리에 가입했다. 1999년 대학에 입학한 우리도 설레는 첫 축제를 맞았다. 까마득한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생생하다.

교내 곳곳에 천막이 쳐졌다. 젊음의 열기가 닿지 않는 곳이 없었던 5월이었다. 우리 동아리는 제2도서관 앞에 자리를 얻어 주점을 열었다. 어리기만 했던 나와 친구들도 술을 팔고 음식도 만들었다. 엄마 없이는 밥도 못 해 먹던 우리가 쥐포를 튀기고 부추전을 구워 팔았다. 기름이 손에 튀어도 추억이 되던 시절이었다.

선선한 바람과 함께 저녁이 찾아올 때쯤이면 축제의 하이라이트인 무대 공연이 펼쳐졌다. 국악 동아리에서는 대금을 불고 기타 동아리에서는 기타 공연을 했다. 노래 동아리의 노래 공연이 이어졌다.

가수 뺨치는 실력으로 노래를 부르던 이름 모를 선배님의 노래 한 곡은 훗날 내 노래방 18번 곡이 되었다. BMK의 <꽃 피는 봄이 오면> 이란 노래였다. 난 그날 이후 그 노래를 저장해 두고 차에서 듣는다. 그때마다 20살 축제 무대 앞에서 넋을 잃고 노래를 듣던 내가 떠오른다. 동아리 공연이 모두 끝나면 연예인들의 무대가 이어졌다.

졸업 후 친구들은 모두 취업했다. 우리는 열심히 일했고 결혼을 했고 아이도 낳았다. 자신감 충만 하던 우리는 슬롯의 냉혹한 현실 안에서 깨지고 부서졌다. 결혼과 출산을 겪으며 아름답다고 표현하기에는 무리인 구속을 겪었다. 가족을 이루며 든든한 울타리를 만드느라 속절없이 시간이 흘렀다. 울타리 안에서 남몰래 눈물도 쥐어짜는 세월을 보냈다. 사는 건 결코 만만한 싸움이 아니었다.

우리는 밖에서도 안에서도 부대끼며 살았다. 내면의 갈등과는 별개로 자식들은 자랐다. 물리적 시간과 노력만큼 질풍의 시절은 과거가 됐다. 열정, 패기, 젊음의 모서리는 깎이며 점점 무뎌졌다. 그 틈을 지금은 소박한 여유로 채우고 있다. 올해만큼은 그 여유의 한 조각을 축제에서 즐기고 싶었다.

모이자는 한마디에 축제장으로 대동단결
사흘간의 축제 동안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연예인도 출연했다. 축제 마지막 날, FT아일랜드가 온다는 소식에 우리는 다시 모였다. 이미 그 전날 싸이를 보고 왔다는 민정이의 말이 도화선이 된 것이었다. 각자 저녁을 먹고 만나기로 한 후 나는 단체 톡방에 "관절 조심 하자"라는 우스갯소리를 남겼다. 몸을 사려야 할 나이다.

학교 안은 학과 주점 천막으로 빼곡했다. 공연장으로 향하는 짧은 시간 동안 얼마나 설렜는지 모른다. 무대가 있는 운동장에 도착했다. 드넓게 펼쳐진 운동장은 내가 학교 다닐 때와 많이 달랐다. 초록 잔디와 함께 축구장 면적만 한 운동장이 그때의 흙먼지 날리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날씬한 여가수가 공연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그가 누군지 몰랐다. 알고 보니 우주소녀라는 그룹의 다영이라는 가수였다. 오래전에는 음악 프로를 빼놓지 않고 보며 유명 가수의 이름을 꿰고 살았는데 이제는 아니다. 지나가다 아이돌을 마주쳐도 모르고 지나갈 판이었다. 세월은 사람의 관심사도 바꿔 놓는다. 삶의 우선순위가 바뀌면서 연예인은 자동으로 순위 밖으로 밀리게 되었으니 누가 누군지 알 길이 없었다.

그 후 유명 래퍼 그레이의 등장에 자동 환호가 발사되었다. 랩은 몰라도 그레이라는 래퍼는 알고 있었다. 노상 남편만 보다 이런 눈 호강이 다 있나 싶었다. 그리고 기다리던 FT아일랜드 공연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운 좋게 무대 앞까지 진격했다. 그룹 리더인 이홍기가 분위기를 돋우느라 객석에 질문을 던졌다.

"다들 몇 년 생이예요?"
대학 축제니 당연히 앞자리가 '0'인 친구들이 소리를 질렀다. 중간에 낀 우리도 신이 나 외쳤다.
"80이요."

우리는 그렇게 아들뻘되는 학생들 사이에서 오랜만에 콧바람을 쐬며 기분을 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 뛰고 소리를 질렀다. 노래를 목청껏 따라 불렀다. 힘들 줄도 모르고 시간이 가는 게 아쉽기만 했다. 나는 울컥했다. 20살 시절 즐긴 그 시간이 그리웠고, 27년 만에 다시 축제를 즐기고 있다는 사실에 행복했다.

공연이 끝나고 안개 같은 조명만 잔디밭에 남았다. 나가려는 인파와 뒤섞이는 것을 우려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잠시 앉았다. 그제야 목이 아파왔다. 하지만 이대로 집에 가긴 아쉬웠다. 비록 내일 다시 출근을 껴안은 해가 뜨겠지만 우리는 주점으로 향했다.
맛이 다 다른 하이볼 세잔과 어묵탕을 시켰다. 아줌마 입맛에는 별로인 어묵탕이었지만 그 옛날 우리 역시 젊은 손맛으로 음식을 해 냈을 거라 생각하니 웃음이 나왔다. 분위기를 안주 삼던 시절이었으니 맛은 거들 뿐이었다. 국물을 한 숟가락 뜨며 음식 만드는 학생들을 쳐다봤다. 그 옛날 우리처럼 열심히였다. 이 시간이 지나면 그들 역시 이 순간을 그리워할 것이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랜만의 음주 가무로 정신없이 잠이 들었다. 함께한 경미는 신나게 콩콩 뛰더니 허리에 무리가 와 아직도 병원에 다니고 있다. 나 역시 아직까지 목이 영 시원찮다. 등가 교환이 이런 것일까?

쾌락 뒤에 골병이 들 나이인가 보다. 열심히 축제를 즐긴 대가로 피곤과 통증이라는 청구서를 받았다. 그래도 어떠냐, 47살에 처음 대학 축제를 맞은 듯 우리는 흥분했고 즐거웠다.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젊음도 건강도 영원하지 않음을 한 살 한 살 고개를 넘으며 체감한다. 그럼에도 축제 속 중년인 우리는 충분히 즐거웠고 그 순간 최선을 다해 즐겼다. 마치 20살로 다시 돌아간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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