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3 이번에는 홍수가 찾아왔다

태국의 우기 막바지

bysafari njema

우리 집에는 물이 들어오지 않았다. 우리 동네도 딱히 침수된 곳은 보이지 않았다.


지난 주 목요일 저녁부터 시작된 비가 3일 내내 쉬지 않고 쏟아지는 바람에 전국 곳곳에서 홍수가 났다. 원래 지반이 낮고 짜오프라야강 하구에 자리한 방콕은 우기마다 홍수의 위험을 안고 있는 도시다. 그렇지만 태풍이 온 것도 아닌데 이렇게 하루종일 쏟아지는 비는 자주 있는 일이 아니었다. 뉴스는 연일 자극적인 사진과 영상을 쏟아냈다. 침수된 도로와 물에 잠긴 집, 사람들의 무릎과 허리까지 차오른 물, 그리고 물에 갇힌 오토바이와 자동차들 사이로 배를 타고 이동하는 사람들. 그러나 내가 사는 곳에서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차를 끌고 도로에 나가봐도, 사재기 소동이 났다던 슈퍼마켓에 가보아도 큰 불편은 없었다. 굳이 하나 꼽자면 빨래가 좀처럼 마르지 않는 것 정도였다.


태국의 학교 방학은 한국과 다르다. 한 해 중 가장 더운 3월에서 5월 사이와 우기가 끝나가는 10월 무렵에 방학이 있다. 지난 주까지만 해도 아이들은 학기의 마지막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이번 주 월요일이면 마지막 시험을 보고, 화요일이면 방학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수요일 밤 비행기로 한국에 갈 예정이었다.


방학을 맞아 한국으로 가기 전 화요일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비.자.갱.신.


태국에 사는 외국인에게 매년 한 번씩 찾아오는 일이다. 비자 갱신은 서류를 준비하는 것도 일이지만, 그보다 먼저 이민국 예약을 잡는 것부터 만만치 않다. 한정된 온라인 예약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한 달 전부터 준비해서 사이트가 열리는 순간 30초 안에 4명의 자리를 모두 클릭 해야한다. 올해는 운 좋게 한 번의 시도만에 성공했다. 이제 방학 첫 날 예약된 시간에 이민국에 가서 비자를 갱신하고, 수요일에는 짐을 싸서 밤에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으면 된다.


계획과 준비는 완벽했다.


그러나 비가 그치지 않았다. 점점 많은 지역이 물에 잠기기 시작했고, 급기야 정부는 월요일과 화요일을 특별 공휴일로 지정했다. 방콕과 인근 도시에 내려진 조치였다.


일요일 저녁, 학교 게시판에 공지가 떴다.


"Due to the ongoing floods situation, the school will be close on Monday and Tuseday. All examinations scheduled for Monday have been postponed to Wednesday."


월요일에 예정되어 있던 마지막 시험이 수요일로 미뤄졌다. 공지가 뜬 휴대폰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봤다 . 곧이어 월요일 아침, 이민국에서 메일이 왔다. 예약 취소 안내였다. 이민국도 이틀간 문을 닫는다는 내용이었다. 다음 예약 가능한 날짜나 대안에 대한 안내는 없었다. 단 한 줄, 예약이 취소되었다는 말뿐이었다.

시험, 비자 갱신, 한국행 비행기. 모두 수요일 하루에 해결해야 하는 일이 되었다. 온라인 예약이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수요일 새벽부터 이민국에 가서 줄을 서야 한다. 그날 비자를 받을 수 있을지조차도 가봐야 알 수 있다. 과연 수요일을 무사히 마무리할 수 있을까. 수요일 하루가 48시간쯤 되었으면 좋겠다.


아직 홍수 상황이 끝난 것도 아니다. 4일 만에 비는 그쳤지만 여전히 어느 집 안에는 물이 차 있고, 도로가 잠기고, 오갈 길이 막혀 있다. 누군가는 집을 비우고 임시 대피소로 가야 했을 테고, 누군가는 생계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나의 곤란은 아주 작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걸 알면서도 마음이 자꾸 조급해진다.


이틀을 쉬어버린 이민국에 사람이 얼마나 몰릴까.

과연 당일에 비자를 받을 수 있을까.

아이들 시험은 어쩌지.

비행기는 탈 수 있을까.


계획이 흐트러진 만큼 머릿속도 순식간에 엉켜버렸다. 좀처럼 마르지 않는 빨래를 말리러 빨래방에 와서 건조기를 돌리고 있다. 뱅글뱅글 돌아가는 건조기가 내 머릿속을 더 어지럽힌다. 이제서야 빼꼼히 얼굴을 내비친 해를 내다보며 나는 자꾸 달력을 확인한다. 수요일의 일정을 하나씩 되뇌어가면서.


창밖에는 여기저기 아직 빗물이 고여 있다. 우리 집에는 물이 들이치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 홍수는, 내 삶에도 깊숙이 들어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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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의 메모

방콕은 짜오프라야강 하구에 자리한 낮고 평평한 도시다. 바다와도 가까워 강의 수위와 해수의 영향을 함께 받고, 도시 안에는 운하와 배수시설이 촘촘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방콕의 홍수는 단순히 비가 많이 와서 생기는 것만은 아니다. 폭우가 내리면 빗물이 빠져나가는 속도, 운하와 강의 수위, 조수의 영향 등이 함께 작용한다. 방콕시는 폭우뿐 아니라 강의 범람과 높은 조수, 북쪽에서 내려오는 물까지 고려해 배수와 홍수 방어를 관리하고 있다.

태국의 우기는 대체로 5월 중순부터 10월 중순까지 이어진다. 특히 태국 중부를 포함한 상부 지역에서는 8~9월에 비가 잦고, 10월은 우기에서 건기로 넘어가는 시기다.

2026년 9월 말에 방콕에 짧은 기간 많은 비가 집중됐다. 9월 24일부터 48시간 동안 약 300mm가 넘는 비가 내리면서 주요 운하가 감당할 수 있는 속도보다 빠르게 물이 불었고, 여러 지역에서 침수가 발생했다. 정부는 이동 불편을 줄이기 위해 방콕과 인근 3개 지역을 9월 28~29일 특별 공휴일로 지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