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8 구름이 몰려오는 시간

태국의 우기 풍경

bysafari njema

'아, 곧 비가 오겠구나.'


이곳에서는 비가 곧 올 것임을 알 수 있다. 살아볼 만큼 살아서 생긴 삶의 지혜가 아니다. 누구라도 알 수 있게끔 하늘이 여실히 알려주기 때문이다.

저 멀리서 짙은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한다. 구름은 생각보다 빠르다. 그 움직임을 따라가는 시선이 부지런해진다. 파란 하늘 한쪽을 밀어 내며 기세 좋게 들이닥친 구름떼가 어느새 하늘을 가득 채운다. 미처 구름을 보지 못한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듯 바람이 거세게 불어온다. 나뭇잎이 뒤집히고 옷이 날리며 사람들은 곧 비가 올 것임을 알아챈다. 그러고 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빗방울이 떨어진다.


나는 콘도 23층에 산다. 덕분에 집에 있는 날이면 창밖으로 하늘을 오래 바라볼 수 있다. 한국에 살 때는 하늘을 이렇게 자주 보지 않았다. 바쁘게 걸었고, 고개를 들 일이 별로 없었고, 아파트와 건물 사이 보이는 하늘은 늘 조금씩 잘려 있었다. 그런데 지금 사는 집으로 이사 오고부터 하늘을 보는 습관이 생겼다. 특히 우기가 시작되면 하루에도 몇 번씩 창가에 서게 된다.

배경의 끝에 펼쳐진 산도 없고 시야를 가로막은 건물도 없는 우리 동네. 조각조각 잘린 좁은 하늘이 아니라 지평선으로 이어지는 광활한 하늘이 한눈에 들어온다. 하늘에 드리운 구름의 그림자가 도시를 덮고 있는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치 영화의 한 장면 속에 들어왔나 싶은 순간도 있다. 번개가 치는 밤은 더 그렇다. 어두운 공기 사이로 번쩍하고 빛이 갈라지고 잠시 후 온몸을 울리는 천둥이 따라온다. 빛의 궤적을 따라 섬광처럼 지나가는 번개를 보다보면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따로 없다.


또 재미있는 현상 중 하나는 국지적으로 쏟아지는 비다. 우리 집에서는 빗줄기가 쏟아지는데 조금 멀리 바라보면 도로 건너편은 여전히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날도 있다. 같은 시각, 같은 공간이라고 생각했는데 비가 오는 곳과 오지 않는 곳이 선명하게 나뉘어 그 경계가 보이다니. 마법에 걸려야만 넘어갈 수 있는 다른 세계가 눈앞에 펼쳐진 듯 하다.


하늘이 컴컴해지고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거리의 오토바이들이 제일 바빠진다. 주어진 시간은 십 분 남짓. 처마 밑, 건물 입구, 고가도로 아래처럼 비를 피할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잠시 멈추어 선다. 분주하지만 익숙하게 우비를 꺼내 입고 남은 목적지를 향해 또 달리기 시작한다. 걷더라도 우산은 별로 소용이 없다. 거센 바람을 타고 옆으로, 아래로, 사방으로 들이치는 비에 우산은 번거롭기만 하다.


그렇게 한바탕 쏟아지고 나면 또 언제 그랬냐는 듯 하늘이 다른 얼굴을 내민다. 비가 지나간 자리에는 놀랄 만큼 맑은 빛이 남는다. 구름 사이로 다시 햇빛이 내려오고, 젖은 건물과 도로 위로 저녁빛이 번진다. 어떤 날은 분홍색, 어떤 날은 주황색, 또 어떤 날은 보랏빛이다. 그 색의 향연이 아름다워서 노을 사진을 찍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난 뒤 조금씩 달라지는 매일의 하늘을 간직하고 싶어서다. 하늘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시간을 바라보는데도 매번 다른 그림을 선사해준다.


오늘도 거실 창 앞에서 노을을 기다린다. 하늘을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는 나를 느낀다. 한국에서는 휴대폰 앱으로 날씨를 확인하곤 했다. 오늘 기온은 몇 도인지, 비가 오는지, 우산을 가져가야 하는지. 그런데 지금의 나는 날씨를 직접 보고 느끼고 알아가는 사람이 되었다. 저 멀리 어떤 구름이 오는지, 바람이 어느 방향으로 부는지, 빗줄기가 어디에서 시작되는지, 비가 지나간 뒤 하늘이 어떤 색으로 변하는지를 알아간다.


처음에는 불편했던 비가 이제는 하루의 풍경이 되고, 무심히 지나치던 하늘이 기다리는 장면이 된다. 오늘도 저만치에서 검은 구름이 몰려온다. 어느새 창가에 서서 구름의 움직임을 숨 죽여 바라본다.


곧 비가 오겠구나.


미리 휴대폰을 찾아 손에 쥔다. 비가 지나간 뒤, 오늘은 또 어떤 하늘이 펼쳐질지 모르니까.


KakaoTalk_20260825_150009467.jpg<매일 다른 화폭의 하늘>




★ 이방인의 메모

방콕의 계절은 크게 건기(11월-2월), 혹서기(3월-5월), 우기(6-10월)로 나뉜다. 야외 활동하기 가장 좋은 때로는 건기를 꼽지만, 최근에는 이 시기에 미세먼지가 심해 날씨만으로는 최적의 날을 정하기는 어렵다.

방콕의 우기는 하루 종일 비가 내리는 장마와는 조금 다르다. 짧은 시간에 강한 비가 쏟아지는 스콜성 소나기가 반복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9월~10월에는 강수량이 많아 침수나 홍수에 유의해야 한다. 비가 내리는 시간은 짧은 편이지만, 바람을 동반한 강한 소나기가 많아 우산보다는 우비가 실용적이다.

새벽이나 오후, 이른 저녁에 비가 집중되는 경우가 많다. 우기에 방콕에 머문다면 오전에 야외 일정을 잡는 것이 요령이다. 그리고 비가 그친 뒤의 하늘을 놓치지 말 것. 씻겨 나간 공기 속으로 펼쳐지는 노을은 우기에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방콕 풍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