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4 오늘을 담는 봉지

비닐봉지 천국

bysafari njema

태국에 살면서 가장 오래 적응하기 어려웠던 부분은 더위도, 오토바이도 아니었다. 바로 비닐봉지였다. 처음으로 길거리에서 음료를 주문했을 때였다. 얼음을 갈아넣은 시원한 주스가 일회용 컵 대신 비닐봉지에 담겨 나왔다. 가게 주인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비닐봉지에 음료를 붓고 빨대를 꽂은 뒤 고무줄로 입구를 단단히 묶어 건넸다. 낯설지만 막상 손에 들면 의외로 편리함에 또 한 번 놀라곤 한다.

그것이 시작이었다. 눈을 크게 뜨고 보니 이 도시는 온통 비닐봉지 투성이었다. 국물이 찰랑이는 쌀국수도 비닐봉지에 담겨 나왔다. 볶음밥도, 그린커리도, 망고와 찹쌀밥도. 심지어 조각 수박 한 덩이도, 얼음을 가득 채운 커피 한 잔도 말이다. 말 그대로 모든 것이 비닐봉지 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한국에서는 무엇을 담느냐보다 어떻게 예쁘게 담느냐를 많이 생각했다. 텀블러, 밀폐용기, 예쁜 도시락통, 친환경 포장, 브랜드 쇼핑백. 반면, 이곳에서는 놀랄만큼 단순하다. 고민의 여지 없이 담기만 하면 된다. 국도, 반찬도, 간식도, 과일도, 음료도 모두 비닐봉지에.


'왜 이렇게 보기 싫게 대충 담지?'


처음에는 성의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살다 보니 알게 되었다. 보기 좋은 모양새보다 기능과 목적에 더 충실한 포장이었다는 것을. 집에서 요리하지 않는 주거환경과 문화, 가성비 좋은 외식 물가, 오토바이 이동이 많은 생활방식, 그리고 오래 신선함을 유지해야 하는 더운 날씨까지. 대충 담는 게으른 문화가 아니라 이 나라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에 가장 잘 맞는 형태일 수 있다는 것을 한참이 지난 후에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었다.

어느 날부터는 비닐봉지가 아니라 그 안에 담긴 삶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닐봉지는 단지 포장이 아니었다.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으로 보였다. 오래 보관하기보다 바로 먹고, 많이 쟁여두기보다 필요할 때마다 사고, 무겁게 들고 다니기보다 가볍게 움직이는 삶. 그 작은 비닐봉지 하나가 이 도시의 리듬을 닮아 있었다. 그제야 문득 내 삶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나는 삶마저 보기 좋은 모양으로 만들기 위해 애쓰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 애씀이 내 삶을 너무 무겁게 만들지는 않았을까.


오늘 먹을 만큼만.

오늘 들고 갈 수 있을 만큼만.

오늘 필요한 만큼만.


나는 늘 내일을 준비하며 살았다. 계절을 앞질러 계획을 세우고, 혹시 모를 일을 대비하며, 아직 오지 않은 시간을 위해 오늘을 조금씩 저축했다. 그런데 이곳 사람들은 오늘 하루를 비닐봉지 하나에 담아 경쾌하게 들고 걸어가는 것처럼 느껴졌다. 현재를 사는 법을 잊어버린 나에게 새롭게 보이는 풍경이었다. 매일 나에게 주어진 하루와 지금 이 순간을 가볍게 비닐봉지에 넣어 살아도 괜찮겠다는 마음이 들었다.


언젠가는 비닐봉지도 다른 무언가로 바뀔 것이다. 그래야 한다고도 생각한다. 편리함과 가벼움을 누리면서도 환경을 걱정하는 모순 속에서 나 역시 자유롭지 못하다. 다만 그 전에 비닐봉지에 녹아있는 태국 사람들의 삶을 본다. 비닐봉지 하나에도 한 나라의 기후와 생활방식, 경제와 문화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는 것을. 문화란 옳고 그름보다 먼저 '왜 그렇게 되었는가'를 이해하는 일이라는 것을. 비닐봉지를 들고 웃으며 퇴근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생각한다. 나 역시도 이곳에서만큼은 오늘의 몫을 품고 가벼운 마음으로 살아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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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방인의 메모

태국 정부는 2020년부터 대형마트와 편의점에서 일회용 비닐봉지 제공을 중단하는 정바카라을 시행했다. 당시 장을 보러 나온 사람들은 장바구니 대신 빨래바구니, 양동이, 여행용 캐리어, 화분, 밥솥 등 집에 있는 물건을 들고 나와 물건을 담아 가는 모습으로 SNS에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처음에는 웃음을 자아내는 장면처럼 보였지만, 그 풍경은 태국 사람들의 생활 방식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정해진 방식이 없으면 그때그때 가장 실용적인 방법을 찾아내는 유연함. 불편한 상황에서도 유머를 잃지 않는 태도. 태국다운 여유가 담긴 장면이었다.

비닐봉지 정바카라은 이후 시간이 지나며 느슨해진 곳도 있지만, 백화점과 일부 대형마트에서는 지금도 장바구니 사용을 권장하고 있다. 최근에는 콘도와 아파트에서도 분리배출 규정을 강화하는 등 환경에 대한 관심은 조금씩 생활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변화는 빠르지 않지만, 분명 같은 방향을 향해 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20200103ds-7-2.jpg태국 SNS에 올라온 기발한 장바구니 사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