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3 세 번째 칸

태국에서 젠더 바라보기

bysafari njema

태국에 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그리 어렵지 않은 서류를 작성하는 중이었다. 이름, 나이와 생년월일을 쓰고, 주소를 적은 뒤 익숙한 칸 앞에서 펜이 잠시 멈췄다.

'성별'

한국에서라면 망설일 이유가 없는 칸이었다. 남성과 여성, 둘 중 하나에 체크하면 끝이었다. 그런데 그 서류에는 칸이 하나 더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태국어인지라 처음에는 내가 잘못 본 줄 알았다. 번역기를 켜 보고, 옆 사람의 서류도 슬쩍 들여다봤다. 정말이었다. 남성도 여성도 아닌 다른 누군가를 가리키는 또 하나의 선택지가 있었다. 그 작은 빈칸 하나가 낯설고 신기했다.


그날 이후부터였을까. 전에는 보이지 않던 풍경들이 하나둘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동료,

슈퍼마켓에서 웃으며 손님을 맞는 계산원,

아이들 행사의 진행을 맡은 슬롯자,

그리고 콘도에서 인사하는 관리사무소 직원까지.


처음에는 일상 속에서 그들을 마주칠 때마다 한 번씩 놀라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는 놀라지 않게 되었다. 놀라지 않는다는 사실조차 의식하지 않을 만큼 익숙해졌다고 해야 할까. 그들은 어느새 자연스러운 일상 속 풍경이 되었다.

이곳에서는 까터이(กะเทย)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레이디보이(ladyboy)라는 영어표현도 함께 쓰이는데, 이 단어를 당사자들 스스로가 아무렇지 않게 쓴다는 것이 어색할 때도 있었다. 나는 처음 새로운 단어 하나를 배운 줄만 알았다. 하지만 살다 보니 그것은 단어 하나를 배우는 일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또 다른 방식 하나를 배우는 일이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사람을 참 쉽게 분류하며 살아왔다. 언제부터였는지 기억도 하지 못한 채, 처음부터 그렇게 정해져 있었던 것처럼. 이것 아니면 저것으로 나누어 이름표를 붙이고 나면 그 사람을 다 안 것처럼 착각을 하기도 했다. 그런데 태국에서 배운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방식은 자꾸 그 이름표를 떼어냈다. 떼어낸 자리에서 비로소 사람이 존재 자체로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을 지칭하는 말도, 그들의 모습도 이곳에서는 숨겨야 할 비밀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곳에서 설명이 필요한 누군가가 아니라, 그저 평범한 풍경일 수 있었다.

이 나라가 성 정체성에 대해 완전히 관대한 슬롯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 차별도 있고 편견도 있다. 그러나 적어도 이 나라에서 그 존재는 일상의 바깥으로 밀려나 있지 않다. 자신의 진짜 모습을 감추지 않고 거리를 걸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내가 살아온 슬롯와는 다른 공기를 느낀다.


태국에 산 지도 어느덧 아홉 해. 이제는 서류에 빈칸 하나가 더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오히려 사람을 두 칸으로만 나누려 했던 내 익숙함이 조금 낯설어진다. 세상에는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곳은 그 사실을 거창하게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었을 뿐이다. 다양성이란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특별한 날 외치는 구호가 아니라, 누구도 특별히 의식하지 않는 평범한 하루. 마치 서류의 세 번째 칸이 아무렇지 않게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가끔 편협한 생각이 들 때면 그 서류의 세 번째 칸을 떠올린다. 칸이 있다는 것은 그 안에 들어갈 사람을 처음부터 상상했다는 뜻이다. 그 작은 빈칸 하나가 생각보다 훨씬 넓은 세상을 품고 있었다.





★ 이방인의 메모

태국에는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말이 하나만 있는 것은 아니다. 가장 널리 알려진 '까터이(กะเทย)'는 주로 여성으로 살아가는 트랜스젠더 여성을 뜻하며, 모든 성소수자를 가리키는 말은 아니다. 그 밖에도 남성적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여성을 뜻하는 '톰(ทอม)', 여성적인 파트너를 뜻하는 '디(ดี้)', 영어에서 온 '게이(gay)', '레즈비언(lesbian)', '바이(bisexual)' 등의 표현이 함께 사용된다. 태국에서는 다양한 성 정체성과 표현을 구분하는 말이 오래전부터 일상 속에서 사용되어 왔고 각각의 정체성을 구분하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다. 최근에는 특정 정체성보다 '성 다양성(ความหลากหลายทางเพศ)'이라는 포괄적인 표현도 점점 많이 쓰이고 있다.


이 글에 등장하는 '세 번째 칸'은 내가 실제로 작성했던 한 신청서에서 만난 것이다. 다만 태국의 모든 공식 서류가 같은 형식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주민등록과 신분증 등 법적 제도는 여전히 출생 시 지정된 성별을 기준으로 운영되며, 성별 정정에도 법적 제약이 남아 있다. 태국 슬롯는 다양한 성 정체성이 일상에서 비교적 잘 드러나는 편이지만, 슬롯적·법적 과제가 모두 해결된 것은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