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국의 복권 이야기
꼭 일 년 전쯤의 일이다. 토요일 오후 느긋하게 뒹굴거리고 있던 우리 가족은 갑작스러운 남편의 외침에 깜짝 놀랐다. 남편은 비가 곧 쏟아질 것 같아 발코니에 내놓은 빨랫대를 들이러 나간 참이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가보니, 발코니 가장자리의 에어컨 실외기 쪽 난간이 없어졌다. 이게 무슨 일인가 싶어 잠시 생각회로가 멈추었다. 우리 집은 무려 23층. 발코니 한 쪽 끝이라고 해도 가려고 생각만 하면 발길이 닿는 곳에 난간이 없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집 발코니에서 직선으로 수직낙하하면 콘도에 드나드는 모든 사람의 발길이 닿는 주출입구가 있다.
당황한 우리는 콘도 단톡방과 관리사무소에 이를 알리고 어떻게 된 일인지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지진으로 인한 외벽 손상을 복구하기 위해 외벽 페인트 공사가 며칠째 진행 중이었다. 그렇다면 줄에 매달려 작업하는 페인트 작업자들과 관련이 있을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 커다란 난간이 23층 공중에서 어디로 사라져버렸단 말인가.
관리사무소 직원들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누가 봐도 황당한 이 사건이 오리무중으로 들어가려는 찰나, 떨어진 난간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다.
'엥? 정말 난간이 아무도 모르게 스스로 떨어져 날아갔다고?'
사라진 난간의 행방을 찾아온 관리사무소 직원들의 설명은 이러했다. CCTV도 보고, 외벽 작업을 하던 페인트 작업자의 진술도 들었다고 했다. 비가 오기 직전에는 태풍같이 센 바람이 불기도 하는 곳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하루 전 비가 올 때 바람에 뜯어져 날아갔다는 것이다. 문득 페인트 작업을 한다고 페인트가 묻지 않도록 난간을 비닐로 칭칭 싸놓았던 것이 떠올랐다. 바람이 불 때 그 힘을 받지 않기 위해 커다란 현수막에도 구멍을 뚫어놓곤 하는데, 페인트 작업자가 거기까지는 생각을 못 한 듯 했다. 안 그래도 거센 바람에, 비닐로 싸여져 커다란 하나의 판이 되어버린 난간이 그대로 힘을 받아 뜯어져 나간 것이었다.
거기까지 설명을 듣고 나니, 주출입구 또는 주차장으로 떨어지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가슴을 쓸어내리게 했다. 바람의 힘이 적당하게 강하여 자로 잰 듯 정확하게 우리 콘도와 옆 회사 건물 사이의 나무 숲속으로 떨어졌다. 어떻게 이런 일이 생겼나 하는 황당함이 여전히 가시지 않았지만 그래도 역시 아무도 없는 나무 숲으로 떨어진 것은 정말이지 운이 좋았다. 하마터면 더 큰일이 생길 뻔했구나, 싶은 안도감에 다리가 풀렸다.
이 사건에 콘도의 단톡방이 다 같이 난리 법석이 났다. 누군가는 화를 냈고, 누군가는 바카라임을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아직 외벽의 페인트 보수 공사는 끝나지 않았고 대부분 세대의 발코니 난간은 아직 비닐로 칭칭 싸여 있었으니까. 이 때 남편이 농담 한 마디를 띄웠다.
"우리 집 호수의 복권을 사세요~"
단톡방이 잠시 조용해졌다. 그리고 이내 웃는 이모티콘이 하나둘 올라오기 시작했다. 나도 그제야 웃음이 났다.
태국에는 불교를 기반으로 한 다양한 민간신앙이 존재하기에 미신도 많다. 그래서 숫자에 대한 호불호도 강한 편이다. 무슨 특별한 일이 생기면 그것에 연관된 숫자로 복권을 사는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다. 그것을 생각하며 남편이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었다. 천 세대가 사는 콘도에서 우리 집만 당첨되어 발코니 난간이 날아갔으니 운도 이런 운이 없지 않겠느냐는 뜻이었다. 남편의 농담 한 마디에 조금 전까지 무겁기만 하던 마음이 이상하리만큼 가벼워졌다. 아무것도 해결된 것은 없었다. 그런데도 화를 내던 사람들이 웃고 있었다.
마침 며칠 뒤 회사 앞을 지나다가 복권 판매상을 마주쳤다. 남편의 말이 생각나 살펴보니 뒷번호 세 자리가 우리 집 호수와 같은 복권이 있길래 냉큼 사 왔다. 태국의 복권은 우리나라 로또처럼 내가 원하는 번호를 조합하여 프린트할 수 있는 복권이 아니다. 좌판에 각 장의 번호가 보이도록 붙여놓은 빽빽한 복권들 중에 마음에 드는 번호를 골라 사야한다. 내 마음에 꼭 드는 번호를 마주치는 것만도 이미 우연히 찾아온 행운이다. 복권은 꽝이었다. 그래도 남는 장사였다. 난간이 날아갔어도 아무도 다치지 않은 일, 화를 내던 주민들이 함께 웃었던 일, 난감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일, 그리고 우연히 복권 판매대에서 내가 원하는 숫자를 만난 일까지. 생각해보니 그 사건으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더 많았다.
많은 사람들은 행운을 기다리며 복권을 산다. 하지만 나는 행복해지기 위해 복권을 산다. 당첨을 바라기보다는 오늘 하루 한 번쯤은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기 위해. 삶은 생각보다 자주 우리를 넘어뜨린다. 발코니 난간이 날아가는 일도 생기는 게 삶이니까. 그때마다 툭 던지는 농담 하나, 함께 웃는 웃음 하나, 고르고 골라 산 복권 한 장 같은 것들이 다시 일어날 이유가 되어주기도 한다. 행운은 기다려도 내 뜻대로 찾아오지 않는다. 그러나 행복은, 내 마음 속에서 만들어지고 조금씩 자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 이방인의 메모
태국에서는 우리나라의 아파트를 콘도라고 부른다. 정확히는 분양형 주거 건물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일상에서는 고층 주거 건물 전반을 콘도로 통칭한다.
태국 복권은 매월 1일과 16일, 한 달에 두 번 당첨번호를 발표한다. 복권 한 장의 정가는 80바트지만 판매상 마진이 붙어 보통 100바트에 거래된다. 1등은 6자리 숫자를 모두 맞춰야 하며 당첨금은 600만 바트, 현재 환율로 약 2억 7천만 원이다. 같은 번호로 여러 장을 살 수 있어서 2장을 사면 당첨금도 두 배가 된다. 6자리를 다 맞추지 못해도 앞뒤 세 자리, 혹은 뒤 두 자리만 맞으면 소액이라도 당첨금을 받을 수 있다. 태국 사람들 대부분이 뒷자리 두 숫자에 집중하는 이유다.
복권은 길거리 좌판이나 시장, 편의점 앞에서도 쉽게 살 수 있다. 원하는 번호를 출력하는 방식이 아니라 이미 인쇄된 번호 중에서 마음에 드는 것을 고른다. 특별한 사건이 생기면 그와 관련된 숫자로 복권을 사는 문화가 있다. 자동차 번호판, 꿈에서 본 숫자, 집 번호, 심지어 뉴스에 나온 숫자까지 복권 번호가 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