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꽃은 핑계다

땅끝보배농원, 가을 밤호박 곁순제거 시기

by농부아내


가을에 재배하는 밤호박은 봄보다 훨씬 빠르게 자란다. 봄에는 모종을 심고 15~20일쯤 지나 첫 순치기 작업을 시작하지만, 가을에는 10일 정도면 곁순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재배방식에 따라 곁순제거하는 시기는 차이가 있다. 땅끝보배농원은 원줄기, 즉 어미줄기만 키워 그 줄기에서만 밤호박이 달리게 하는 방식으로 재배한다. 가을 밤호박의 곁순제거(순치기) 시기는 본잎이 5장 이상 될 때이다. 조금 늦어도 밤호박이 자라는데 큰 차이는 없다. 단지 많이 자란 곁순을 하나씩 제거하려고 긴 시간 쪼그리고 앉아 있으면 허리만 아플 뿐이다.


2026년 가을 밤호박 재배일지
- 8월 17일 파종
- 8월 30일 정식
- 9월 10일 1차 순치기
- 9월 14일 2차 순치기






여유롭다.

하우스 한 동에만 가을 밤호박을 심었더니 네 동의 하우스에서 작업하던 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마음도 몸도 한결 여유롭다. 언제 순치기를 시작해야 하나 밤호박과 잎 수로 밀당하지 않고 적당히 키우다가 천천히 곁순을 정리했다.


9월 10일


나도 마음이 여유롭지만 농부님도 그런 듯하다.

미생물을 직접 배양하고, 물 주는 방식도 조금씩 달리하고, 매일 아침 하우스에서 돌도 줍는다. 가을 밤호박에게 이것저것 시험해 보는 모양이다. 그 정성을 알아차렸는지 밤호박들도 초록 잎을 하나둘 늘려가기 시작했다.


예년같았다면 농부님의 그런 돌봄이 부담스러웠을지도 모른다. 순 치는 작업을 해야 할 내 입장에선 하루라도 더 쉬었다가 일하고 싶으니까. 그런데 올해는 달랐다. 아침저녁으로 부는 상쾌한 바람처럼 잎이 늘어도 마음이 가볍다.

곁순제거 전(좌) 후(우) / 9월 10일


모종을 심고 열흘쯤 되었을까. 이맘때면 순 칠 때가 된 걸 아는지 몸이 근질근질하다. 하우스를 둘러보니 이제 작업을 시작해도 되겠다.


"내일부터 순 칠게"

"더 키워서 해"


농부님은 조금 더 키워서 하라고 했다. 내 마음은 이미 하우스에 가 있었다.


"꽃 피면 안되니까 그냥 할게"


장갑을 끼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 아침 일찍 하우스로 향했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1차 순치기는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끝났다. 오랜만에 쪼그려 앉았더니 허리가 아팠고, 초가을이라는 말이 무색하게 하우스 안은 금세 뜨거워졌다.


9월 14일


1차 순치기 작업이 끝나고, 그 사이 일하기 좋은 날씨가 되어 자꾸만 하우스로 나를 등떠밀었다. 9월 13일 저녁, 잠깐이면 되겠지 싶어 작업복을 입고 하우스에 들어갔다. 하지만 해가 빨리 져 작업을 끝내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다시 하우스로 갔다.

5일 만에 만난 밤호박들은 어느새 쭉쭉 뻗어 그물을 향하고 있었다. 암꽃 봉오리도 보여 아직은 때가 아니라며 제거했다. 3일에 한 번씩 정리하면 수월할 텐데 5일 만에 만났더니 덩굴손이 서로 꼬이고, 줄기가 엉뚱한 방향을 바라보는 녀석들도 있었다.


생각보다 일이 많았다. 그래도 하우스 한 동뿐이라 마음은 여전히 여유로웠다.




수꽃은 핑계다.

봄보다 일이 줄어들고, 일하다 간식을 챙겨 먹는 버릇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꾸 입이 궁금해 먹다 보니 체중계의 앞자리가 바뀌었다. 뭘 하든 밖으로 나가 움직여야 했다. 마음의 여유만큼 불어난 뱃살을 달래려면 말이다.


그래서 가을 밤호박의 곁순을 치러 오늘도 하우스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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