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왕 이렇게 된 거 끝내버리자

가을 텃밭 준비

by농부아내


폭염으로 잡초마저 말라버리던 8월 초중순이 지나고, 비가 조금씩 내리기 시작했다. 아침저녁으로 선선한 바람도 불었다. 이때다. 이제 슬슬 가을 텃밭을 준비해야 한다. 가을 텃밭 준비를 벌써 끝낸 사람들도 있겠지만, 올해는 폭염이 워낙 심했던 터라 예년보다 조금 늦게 시작하기로 했다.






무안의 젤로 대량 주문 작업을 끝내고 며칠 푹 쉬었다. 8월 말이 가까워지자 웬일로 농부님이 텃밭은 언제쯤 시작하냐고 묻는다. 아마 젤로 만드느라 고생시킨 게 미안해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 마음이지 않았을까. 미안할 게 뭐 있나, 우리 일이니 같이 하는 거지. 말해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엄청 부릴 것 같아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더 이상 미룰 수도 없었다. 가을 작물을 파종하려면 밭부터 정리해야 했다. 내가 먼저 제초매트와 비닐을 걷어내기로 했다. 마침 비 예보도 있어 비가 오기 전에 끝내고 싶었다.


제초매트, 비닐 철거 전/후(8월 23일)


일요일 아침. 살짝 구름이 낀 날씨에 바람도 불었다. 일하기 좋을 것 같아 채비를 하고 텃밭으로 나갔다. 봄 작물 수확이 끝난 뒤 그대로 내버려둔 밭에는 잡초가 제집인 양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하지만 잡초보다 먼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제초매트 철거. 고정핀을 하나씩 뽑기 시작했다. 농부님이 사다 준 ‘우산모자’까지 쓰고 야심차게 시작했는데, 바람이 불어 모자가 벗겨졌다. 결국 우산모자는 포기하고 작업모자로 갈아썼다.


고정핀을 뽑고 제초매트를 걷어냈다. 재활용한 제초매트라 올이 풀리고 구멍 난 곳도 많았다. 여러 조각을 이어 붙여놓은 터라 걷어내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그래도 봄 텃밭을 꾸리는 동안 잡초와의 전쟁에서 나를 꽤 많이 도와준 우군이었다.


남아 있던 가지와 방울토마토도 뽑았다. 가지는 서리가 내리기 전까지도 수확할 수 있지만, 식탁에 가지반찬이 올라올 때마다 울상을 짓던 둘째가 떠올랐다. 올해는 이쯤에서 포기하기로 했다. 비닐을 걷으며 손으로 뽑을 수 있는 잡초는 정리하려고 했지만, 깊게 뿌리내린 잡초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잡초는 포기하고, 비닐까지 모두 걷어내고 나니 어느새 점심시간이었다.






"제초매트랑 비닐 다 치았거든. 갈아주시면 돼요"

가지와 방토를 붙잡고 있던 지지대는 농부님에게 부탁하고, 밭을 갈아달라고 했다.


8월 26일


일요일에 철거를 끝냈으니 다음 날 바로 갈아줄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농부님은 언제나 '마음의 준비'가 필요하지 않던가.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기면 먼저, 빨리 끝내놓아야 마음이 편하다.


멀칭을 걷어낸 지 사흘째 되던 날 저녁, 드디어 농부님이 나섰다. 저녁 운동을 다녀오는데 집 근처에서 트랙터 소리가 들렸다. 한낮에는 다시 폭염이 찾아와 저녁에 작업을 하기로 한 모양이다. 내게는 반가운 트랙터 소리였다. 밭이 다시 살아나는 소리 같았다.






다음 날 밭에 나가 보니 땅이 말끔하게 갈려 있었다. 예쁘게 갈린 밭을 보니 쾌감과 함께 안정감이 느껴졌다. 살충제와 밑거름을 뿌리고 한 번 더 갈아주면 좋겠지만, 주말에 비 예보가 있었다. 비 오기 전에 밭을 다 만들고 파종까지 끝내고 싶었다.


8월 27일


농부님이 관리기 수리(셀프)를 해야 골을 팔 수 있다고 했다. 관리기로 하면 금방 될 일이었지만, 내 욕심에 삽을 들었다. 두둑을 덮을 비닐을 창고에서 꺼내와 너비를 맞추고, 삽으로 흙을 퍼 올려 두둑을 만들었다. 두둑을 평평하게 다듬고 비닐을 덮기 시작했다.


덥다. 힘들다.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일기예보에는 구름이 끼고 늦은 오후부터 비가 온다고 했다. 그런데 하늘은 맑고 햇살은 뜨거웠다. 콤부차며 링포텐이며, 물까지 계속 마셨다. 내가 밭일을 하러 나온 건지 물을 마시러 나온 건지 모르겠다.


이제 제초매트만 덮으면 됐다.



하지만 햇님은 도무지 멈출 생각이 없고, 먼지를 먹지 않으려고 쓴 마스크 때문에 숨쉬기도 힘들었다.


그만할까. 제초매트는 비 온 뒤에 덮을까.


잠깐 고민했다. 하지만 땀에 젖은 몸으로 여기까지 온 김에 끝내버리기로 했다. 그게 나다운 선택이었다. 재활용한 제초매트를 굴려서 펼친 뒤 간격을 두고 고정핀을 하나씩 박았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몸에 빨간불이 들어올 때쯤 공장 일을 끝낸 농부님이 왔다. 평상에 앉아 물을 마시고 쉬고 있는데 어지러웠다. 농부님께 사탕 하나를 갖다 달랬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그만 하고 들어오라며 사탕을 건네 준다.


"진짜, 쪼깸만 더 하모 돼~"


정말이었다. 20분 뒤, 마지막 고정핀을 박고 가을 텃밭 준비를 마쳤다.




파종까진 도저히 할 수 없었다. 비가 오든 말든 일단은 내가 쉬어야 했다. 그날은 결국 비가 오지 않았다. 비가 오지 않을 것 같으면 적당히 치고 빠져야 한다. 이번에는 내 욕심이 조금 앞섰다. 그런데 다음 날 바로 비가 내렸다.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그날 끝내길 잘했다. 하늘을 읽을 줄은 몰라도, 가끔은 내 감을 믿어도 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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