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호박 수정
한 마리 벌이 되어 수정하는 농부님의 모습을 본 지도 벌써 10년째다. 해가 뜨기 전, 하우스에 나가 휴대폰 불빛으로 일하고 있다보면 해가 떠오른다. 어스름한 푸른 빛이 돌며 서서히 밝아지는 그 순간, 세상이 조용히 깨어나는 장면을 보고 있으면 마음이 웅장해지기도 한다. 그때쯤 칙칙~ 하는 소리와 함께 농부님이 등장한다.
밤호박 줄기를 길게 유인한 탓에 올해는 작년보다 수정 시작이 사나흘 늦어졌다. 그물 위로 매달리게 하려다 보니 시작점이 밀린 것이다. 나는 예전처럼 첫 암꽃의 위치를 골반 근처쯤으로 맞추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그럴 수가 없었다. 멀칭 비닐 타공 위치를 바깥쪽으로 잡으면서 줄기 길이가 예상보다 길어졌고, 결국 아래쪽에 꽃을 남기게 되었다.
내 마음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습한 날들이 이어지던 어느 해, 받침대를 놓다가 하얀 곰팡이가 핀 밤호박을 발견했다. 잎과 호박 사이에 남아 있던 꽃의 흔적들이 겹치면서 눅눅해져 밑동이 물러지며 썩어 있었다. 결국 따서 버려야 했다. 정성 들여 키워서 이제 막 수확할 수 있을 것 같던 호박이, 가장 기대하던 순간에 무너져버리는 일은 썩 기분좋은 일은 아니었다.
올해는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왜 썩어 버리는지 알기 때문에 조치를 취하면 된다. 밤호박 꽃이 오므라들고 호박의 형태가 갖춰질 때쯤 꽃자국을 떼어 내면 된다. 손이 더 가고, 허리를 더 굽혀야 하지만 그 정도 수고는 기꺼이 감수할 수 있다. 썩어가는 호박을 바라보는 것보다야 훨씬 나으니까.
4월 30일, 노란 호박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했다. 그날을 시작으로 농부님은 다시 ‘벌’이 되었다. 아침 일찍 수정액을 조합해 허리춤에 통을 차고 하우스로 들어간다. 꽃은 하루 사이에도 눈에 띄게 늘어난다. 처음엔 드문드문 보이던 노란색이, 며칠이 지나면 네 동의 하우스에서 선명한 노란색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10년 동안 농부님이 수정하는 걸 자세히 지켜본 적은 없었다. 나는 유인하고 순 치는 작업을 해야하니까 각자 맡은 일을 할 뿐이었다. 그런데 하루는 영상을 찍기 위해 수정하는 움직임을 따라가 본 적이 있다.
스윽 스윽.
치익 치익.
허리 근처에서 잎을 살짝 제치고, 필요한 꽃에만 정확하게 분사한 뒤 빠른 속도로 지나갔다. 머뭇거림이 없이 동작은 빠르고 간결했다. 수정을 시작한 지 5일째라 아래의 꽃은 대부분 수정이 끝난 상태였지만 혹시 놓친 것도 있지 않을까.
"아랫쪽에도 꽃이 있어. 밑에도 살펴봐"
"오늘 놓친 건 내일 보면 돼"
나는 그 말이 쉽게 납득되지 않았다. 내가 본 호박꽃은 하루면 시들어버리는데, 내일 본다고? 놓치면 끝 아닌가? 하지만 곧 알게 되었다. 네 동의 하우스를 혼자서 다 돌며 모든 꽃을 빠짐없이 확인하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안에 확률이 높은 선택을 해야 했다.
만약 그 일을 나에게 맡겼다면 어땠을까. 나는 아마 잎 하나하나를 다 들춰보며, 놓치는 게 없도록 확인하고 또 확인했을 것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해가 중천에 떠도 끝내지 못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수정은 아침 시간 안에 끝내야 의미가 있었다. 놓친 꽃 일부를 붙잡느라 전체를 놓칠 수는 없다는 걸, 농부님은 알고 있었다. ‘완벽함’이 아니라 ‘가능한 최선’을 선택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비슷한 리듬으로 흘러가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똑같은 하루는 없었다. 날씨가 다르고, 꽃의 상태가 다르고,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늘 조금씩 다르기 때문이었다. 농사는 ‘정답’이 아니라 ‘선택’이라는 말을, 이제는 조금 알 것 같았다.
모든 꽃을 다 챙길 수는 없지만, 그래도 열매는 맺힌다.
조금 놓치더라도, 끝까지 해낸 것들은 결국 남는다.
오늘 아침에도 농부님은 비슷한 시간에 하우스로 향했다.
하우스 안에서 하루가 다시 시작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