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호박 줄기가 그물에 올라가기 전, 멀칭 비닐 위에서 쭉쭉 뻗어 나간다. 줄기 중간중간에서 부정근이 나온다. 그 뿌리가 비닐을 뚫고 흙에 닿아 자리를 잡으면, 줄기는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고 방향을 잃지 않는다.
그런데 보통 부정근이 자리를 잡기 전에 줄기가 먼저 뻗어 나간다. 하우스 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줄기는 방향을 잃고 스프링처럼 말리거나 뒤집힌다. 그물 쪽으로 가야 할 줄기들이 서로 얽히고, 그걸 하나씩 풀어 방향을 잡아주는 일은 생각보다 번거롭다. 손도 많이 가고, 마음도 괜히 바빠진다.
하우스에 네 줄로 밤호박을 키우던 때에는 심각한 문제는 아니었다. 유인 길이가 길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부정근이 제대로 흙에 박힌 줄기들은 눈에 띄게 달랐다. 훨씬 튼실했고, 뻗어 나가는 길이도 길었다. 땅 힘을 제대로 받고 자라 차이는 분명했다.
올해는 재배 방식을 바꿨다. 덕을 이용한 하우스 두 줄 재배. 그래서 줄기를 훨씬 길게 유인해야 했다. 그만큼 부정근의 효과가 필요했다. 그래서였을까. 농부님이 먼저 방법을 찾았다.
어디서 봤는지 식물 고정 클립을 주문했다. 택배 상자를 열어보고 클립을 꺼내 든 순간, 그 깜찍함에 웃음이 나왔다.
‘이건 아닌데…’
줄기는 시간이 갈수록 두꺼워질 텐데, 클립은 작고 고정폭은 좁았다. 지금은 괜찮아 보여도 마디가 길어지면서 밀려나거나, 오히려 줄기를 눌러 상하게 할 것 같았다. 예상되는 상황들이 있었지만, 일단은 사용해 보기로 했다.
4월 5일, 일요일.
보배동 하우스에 들어가 순을 치다가, 클립을 하나 꺼내 줄기에 꽂아봤다. 지금 당장은 들어갔다. 하지만 앞으로 자랄 시간을 생각하면, 이 상태를 오래 버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아니, 순을 칠 때마다 클립 위치를 바꿔 줘야 할 것 같았다. 할 일이 늘어나는 셈이었다.
하나 꽂아보고는 그대로 상자를 덮었다. 점심을 먹으러 집에 들어와 농부님에게 말했다.
“하우스 한 동 돌고 다시 들어가려면 일주일도 걸리는데, 그럼 줄기 7마디는 더 자라 있어. 저거 못 버텨.”
뾰로통 튀어나온 입으로 불평을 쏟아냈다. 사실, 내가 쏟아낸 말 속에는 "할 일도 많은데 내 일이 추가되는 것 같아 싫어. 당신이 해주라"는 뜻도 함께 있었던 듯 하다.
내 말에 농부님은 짧게 말했다.
“내가 할게. 당신은 당신 일 봐.”
내 마음을 읽은걸까. 이미 해야 할 일은 쌓여 있었고, 토요일마다 다른 일터에 나가다 보니 농장 일에 온전히 시간을 쓰지 못하는 것도 마음을 조급하게 만들고 있었다. 농장 일에 네 일, 내 일이 어디있냐마는 잘못 꽂아 호박 줄기가 부러져 사고를 칠까봐 두려운 마음도 있었다.
결국 그날 오후, 순을 치고 있는데 농부님이 클립 봉투를 들고 하우스로 들어왔다. 말없이 줄기를 하나씩 잡고, 후다닥 클립을 꽂아 나갔다. 그리고는 다른 하우스로 클립을 들고 갔다.
순치기를 마치고 하우스를 나서며, 그 줄기들을 한 번 훑어봤다. 그때였다.
‘어? 괜찮은데…?’
나는 새순이 올라오는 지점에 클립을 꽂고 있었는데, 농부님은 전혀 다른 위치에 꽂았다. 뿌리에 가까운, 마디가 길어져도 무리가 가지 않을 자리였다. 클립이 버티는 위치를 정확히 짚은 것이다.
며칠 뒤, 다시 하우스에 들어갔다.
클립을 꽂아둔 줄기들은 한눈에 티가 났다. 뒤틀림 없이, 방향을 잃지 않고, 그물을 향해 곧게 뻗어 있었다. 줄기를 잡고 방향을 잡아줄 필요도 없었다. 곧게 뻗은 그 자태가 아름다웠다. 게다가 일의 속도도 달라졌다. 예전 같으면 꼬인 줄기를 풀고, 얽힌 걸 떼어내고, 방향을 맞추느라 시간이 꽤 걸렸을 텐데, 그날은 달랐다. 줄기 끝에서 곁순과 암꽃만 톡톡 꺾어주면 됐다. 두 줄 순치기 작업이 두 시간 만에 끝났다.
점심을 먹으러 들어온 농부님에게 말했다.
“여보, 나머지도 다 꽂자.”
농부님은 웃었다. 말은 하지 않았지만, 표정이 말해주고 있었다.
‘거봐라.’
결론적으로, 농부님이 옳았다.
하우스 텃밭을 경운하고 두둑을 만들었다. 멀칭 비닐을 덮어야 했다. 농부님이 잠깐 틈 내서 둘이서 같이 덮으면 금방 끝난다고 도와준다고 했다. 당연히 둘이 하면 금방 끝날테지만, 농부님도 바쁘니 시간을 뺏고 싶지 않았다. 혼자 천천히 사부작 거리며 하면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당신 바쁜데 그냥 혼자 할께"라며 거절했다. 하지만, 밤호박 하우스에서 작업을 마치고 녹초가 된 몸으로 비닐을 덮으려니 엄두가 나지 않아 농부님에게 SOS를 쳤다. 그리고 정말 금방 끝났다.
그는 언제나 옳았다.
그래서 더 얄밉다.
맞는 말을 하는 사람 옆에 있으면,
괜히 더 고집을 부리고 싶어질 때가 있다.
결국은 내 일이 될테지만..
무의미한 저항을 해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