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사이 세수하고 말간 아침을 여는 도시

벵갈루루, 다섯 해 만에 처음 만난 우기

by금파랑

이곳 인도에는 집안일 삼신기 중 하나인 건조기가 없다. 덕분에 세탁이 다 된 빨랫감을 하나하나 빨랫줄에 너는 것이 일이라면 일이다. 메이드에게 부탁해도 되는 일이지만 이것만은 그냥 스스로 한다. 그리고 고백하건대, 요즘 여기서 아침에 빨래를 너는 일이 즐겁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에 시원하게 불어오는 바람. 일찍 일어나 세탁기를 돌리고, 탈수가 된 옷들을 툭툭 털어 널고, 색색의 빨래집게로 살포시 고정해 준다. 두어 시간만 볕 아래에 널어 놓으면 충분하다. 생각해 보면 별것 아니다. 고작 빨래 하나일 뿐인데 금방금방 마르는 게 어찌나 뿌듯한지.


이렇게 인도 벵갈루루에 한동안 머물렀다 가는 것도 어느덧 다섯 해째. 이곳의 아침 공기와 풍경은 늘상 봐 와서 익숙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엔 조금 특별했다. 눈을 뜨면 공기가 맑고, 창밖이 달리 보이고, 들려오는 소리가 쨍하다. 며칠을 그렇게 느끼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왜 유독 이번에, 이 도시의 아침이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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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부터 청명해지는 아침

가만히 따져보니 귀가 먼저 반응하고 있었다. 이른 아침의 벵갈루루는 상대적으로 조용하다. 낮이면 온 도시를 뒤덮는 경적과 엔진 소리, 크고 작은 도시의 소음이 아직 깨어나기 전이다. 그 소음의 장벽이 한 걸음 물러나니, 평소엔 묻혀서 들리지 않던 소리들이 하나하나 또렷하게 떠오른다.


가장 먼저 새소리다. 어찌나 크고 선명한지, 낮에는 이 새들이 다 어디 숨어 있었나 싶다. 멀리서 작게 짹짹대는 새들은 물론이고 높은 소리로 삑삑 울어대거나, 구르르거리며 자기 존재를 뽐낸다. 가끔 멍하니 있다가 푸드덕대는 소리에 놀라 창문 밖을 바라보면, 어느덧 이름 모를 새 한두 마리가 창문간에 앉아 인사를 건네곤 한다. 마치 손을 뻗으면 닿을 것만도 같은 거리. 아무래도 인도 새들은 성격이 외향적인가 보다.


바람소리도 빼놓을 수 없다. 벵갈루루는 원래 나무가 많고, 이파리가 크고 널찍한 나무들이 즐비하다. 아침 바람이 그 넓은 잎사귀들을 스치고 지날 때면 어딘가 간지러운 소리가 난다. 특히 야자수 이파리는 가느다란 갈래가 빗살처럼 촘촘히 갈라져 있어서, 바람이 불면 잎 수십 갈래가 저마다 부딪히며 잘게 부서지는 소리를 낸다. 물기 없이 차르륵대는, 그러나 까슬하지는 않은 소리. 여름밤에 흔들리는 풍경이 따로 필요가 없다.


그다음은 비질 소리. 인도의 아침은 빗자루로 시작한다. 여전히 인도 가정집에서는 전기로 작동하는 진공청소기를 찾아보기 힘들다. 아파트 청소를 담당하는 메이드들이 꼭두새벽부터 마당과 주차장 바닥을 쓴다. 위잉 울리는 모터 소리 대신, 가느다란 나뭇가지들을 촘촘히 엮은 비가 만들어내는 그 소리가 아침을 채운다. 사각사각 바닥을 쓸고 물을 뿌려 먼지를 재우는 소리가 조용한 아침 공기를 타고 오면, 이상하게 마음이 맑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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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째 하늘이 유독 파랗다

그리고 하늘. 그러고 보니 늘 겨울에만 이곳에 왔다. 그때 올려다본 하늘은 언제나 조금은 뿌옇게 흐렸다. 11월 즈음에 있는 디왈리 기간 동안 곳곳에서 벌어지는 불꽃놀이 덕분이다. 이번엔 다르다. 며칠에 걸쳐 확실히 느꼈다. 파란 하늘이 하루이틀이 아니라 계속 이어지니, 우연은 아니었다. 궁금해서 찾아보고 나서야 이유를 알았다. 비 때문이었다.


지금이 마침 우기다. 벵갈루루의 몬순은 하루 종일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아니라, 한바탕 몇십 분 쏟아지고는 이내 상쾌하게 개어 버리는 비다. 게다가 이곳의 비에는 나름의 시간표가 있다. 아침은 맑고 쨍하고, 저녁 무렵이 되면 불현듯 하늘이 어두워지고 비구름이 몰려온다. 하루의 끝에 쏟아진 비가 대기 중에 떠다니던 먼지와 자잘한 입자를 붙잡아 데려가고, 그렇게 밤새 말끔히 씻긴 하늘이 다음 날 아침 말갛게 개어 있는 것이다.


마치 흙먼지가 앉은 도시의 얼굴을 세수하듯 헹궈내고, 새 아침을 파랗게 열어 주는 셈이랄까. 여기에 벵갈루루는 해발 900미터가 넘는 고원에 앉은 도시다. 그 높이 덕에 하늘은 한층 더 쨍하게 파랗다. 캘리포니아가 따로 없다. 이런 비가 매일같이 이어지는 계절이니, 푸르게 갠 아침 하늘이 며칠씩 계속되는 것도 당연했다.


이곳의 아침이 좋다

그래서 결론을 내리자면, 벵갈루루의 아침은 빨래에 딱 좋은 시간이라는 것. 밤새 서늘하게 식었던 공기가 아침 해에 데워지기 시작하면 습기가 슬며시 물러나고, 몬순의 바람이 꾸준히 불어와 널어놓은 옷을 훑고 지나간다. 여기에 비로 씻긴 아침 하늘의 햇살이 구름에 막히지 않고 쨍하게 내리쬔다.


빨랫줄에 널어둔 옷을 보며 "어, 벌써 다 말랐네" 하고 혼자 흐뭇해하는 이 소소한 만족이, 알고 보면 도시 전체가 계절을 갈아입은 결과라니. 새소리와 나뭇잎 스치는 소리, 빗자루 소리가 또렷하고, 하늘이 며칠째 파랗고, 널어둔 빨래가 금방 마르는 아침. 이 소소한 벵갈루루의 아침이, 지금 참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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