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30분의 산바카라
언젠가 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퇴근 후에는 각자 좋아하는 일을 하며 시간을 보낼, 루틴 하나 정도는 꼭 있어야 반복되는 일상을 버텨낼 수 있다는 것. 거창한 취미가 아니어도 좋다고 했다. 하루에 단 5분이라도 온전히 나를 위해 쓰는 시간이 있으면, 그것만으로도 건강한 회복탄력성을 키울 수 있다는 거다. 그 글을 읽으며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과연 무엇일까. 곰곰이 떠올려보니, 그건 다름 아닌 '저녁 산바카라'이었다.
나는 얼마 전부터 저녁을 먹고 샤워를 하기 전, 잠깐씩 산바카라을 시작했다. 사실 그다지 특별할 건 없다. 그저 동네 골목을 걷는 것뿐이다. 하지만 언제부터 이 시간이 하루 중 가장 나다운 순간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낮 동안 회사에서 쌓인 긴장을, 걷는 리듬에 하나씩 흘려보내는 기분이랄까. 대단한 준비는 필요 없었다. 운동화만 갈아 신고 문을 나서면 그만이다. 그 단순함과 간편함이 이 습관을 오래 이어가는 힘인지도 모르겠다.
산바카라의 묘미는 평소 안 가본 길을 걸어보는 데 있다. 자동차나 버스로는 그냥 스쳐 지나갔을 공간들을, 두 발로 직접 밟아보는 것이다. 늘 다니던 큰길 대신 낯선 골목으로 접어들면, 같은 동네인데도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진다. 처음 보는 작은 가게, 담벼락을 타고 오른 넝쿨, 어느 아파트의 작은 불빛들. 익숙한 동네라고 생각했었는데 걷다 보면 여전히 내가 모르는 구석이 이렇게 많았구나 싶어, 매번 새삼 놀라게 된다.
이곳저곳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생각이 정리된다. 하루 종일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일들이, 걷는 동안 조금씩 제자리를 찾아간다. 풀리지 않던 고민의 실마리가 문득 떠오르기도 하고, 애써 잊으려 하던 불쾌한 감정도 어느 순간 슬며시 가라앉기도 한다. 억지로 정리하려 할 때는 오히려 엉키던 생각들이, 이상하게도 걸을 때는 술술 풀린다. 몸을 움직이는 것이 곧 마음을 움직이는 일이기도 하다는 걸, 산바카라은 매번 알려준다.
물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을 때도 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순간이 더 좋을 때가 많다. 아무런 목적 없이 그저 발걸음에만 집중하다 보면, 어느새 머릿속이 텅 비는 무념무상의 상태로 들어간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되는 그 짧은 시간. 그 시간은 하루 중 유일하게 내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는 그런 순간이다. 그리고 그 비어 있는 시간들이 오히려 나를 새롭게 채워간다.
다시 돌아보니 그 글의 조언은 정확했다. 매일 좋아하는 일에 단 5분만 써도, 하루의 무게가 확연하게 가벼워진다. 온종일 남이나 회사를 위해 쓰던 시간을 아주 잠깐 떼어내 나에게 돌려주는 것뿐인데도 그 효과는 생각보다 컸다. 별것 아닌 것 같은 이 짧은 시간이 나를 지켜주는 소중한 버팀목이 되었다. 오롯이 나만을 위한 이 시간이 하루의 일상을 무너뜨리지 않고 버틸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었던 거다.
앞으로도 저녁 산바카라을 계속할 생각이다. 물론 글 쓰기와 바카라 읽기도 늘 함께할 예정이다. 산바카라이 몸으로 하는 생각의 정리라면, 글 쓰기와 바카라 읽기는 마음으로 하는 산바카라 같은 것이니까. 둘 다 대단한 성취를 위한 것은 결코 아니다. 그저 나를 나답게 지켜주는 소소하지만 확실한 방법일 뿐. 오늘 저녁에도 나는 운동화를 신고 문을 나설 것이다. 어제와는 조금 다른 골목을 향해, 조금 더 가벼운 마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