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발자처럼 장편소설 쓰는 법 #1

나는 개발자처럼 장편소설을 썼다

by빌리박

장편소설을 쓰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손이 멈춘다. 초반에 나온 인물의 눈동자가 무슨 색이었는지 갑자기 기억나지 않는 순간 같은 것이다. 분명 앞쪽 어딘가에 썼는데 어디였는지 모르겠고, 검색해 봐도 비슷한 단어가 수십 군데여서, 어떤 날은 그 한 줄을 찾다가 새벽 두 시를 넘긴다. 눈동자 색이면 그나마 다행이다. 어떤 날은 조연의 말투가 초반과 후반에서 딴사람이 되어 있고, 어떤 날은 분명히 죽인 인물이 한참 뒤에서 멀쩡히 걸어 다닌다. 이건 재능의 문제가 아니라 분량의 문제다. 글이 길어지면 누구나 자기가 만든 세계를 조금씩 놓친다.


이 글은 바로 그 문제를 다루는 이야기다.

01-screen-01.png인물·설정·사건이 하나의 거대한 그물로 얽힌 설정집 그래프 뷰


한 편의 장편은 인물·설정·사건이 이렇게 거대한 그물로 얽힌 하나의 세계다. 머릿속에서는 흩어져 부서지지만, 잘 정리해 두면 그 전체를 한 장으로 붙들 수 있다. 이 연재가 만들려는 것이 바로 이런 '정리된 세계'다. (실제 설정집을 그래프 뷰로 본 모습)


왜 '개발자처럼'인가


내가 처음 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 왜 글을 쓰고 싶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이라고밖에는 - 가장 먼저 한 일은 '소설 쓰는 법'을 검색하는 것이었다. 개요를 짜고, 인물 카드를 만들고, 3막 구조를 지키라고들 했다. 하나씩 따라 해 봤지만 어쩐지 남의 옷을 입은 기분이었다. 나는 글쟁이가 아니라 개발자였으니까.


오랫동안 나는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왔다. 그러다 어느 날 SF 장편 「그녀, 내남편」을 쓰기 시작했고, 41화, 27만 자를 앞서 말한 것처럼 자꾸 멈춰 가며 작업을 했다. 멈출 때마다 같은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개발할 때는 이런 걸 머리로 외우지 않는데. 소프트웨어 개발자는 수십만 줄짜리 코드를 다루지만 그걸 통째로 기억하는 사람은 없다. 대신 우리는 기록하고, 검색하고, 누가 언제 무엇을 왜 바꿨는지 버전을 남긴다. 그래야 거대한 프로젝트가 무너지지 않는다. 어느 저녁 문득 생각했다. 소설도 이만큼 거대하다면, 내가 매일 쓰던 그 방법이 통하지 않을 이유가 없지 않을까. 이 글은 그렇게, 개발자가 거대한 코드를 다루는 방식을 소설 쓰기에 그대로 옮겨 본 기록이다.


미리 안심할 것이 하나 있다. 이 방법을 쓰는 데 개발 지식은 필요 없다. 개발자였던 건 나지, 이 글을 읽는 당신이 아니어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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