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는 글쓰기에 도움이 되나

일기 쓰시는 분? 또는 자녀에게 일기를 쓰게 시키는 분?

by박창선

나는 어릴 적 엄마의 전략에 제대로 놀아났어. 엄마는 에버그린 초등용 노트도 아니고 옥스포드 어쩌고가 쓰여진 대학노트 한 페이지를 매일 꽉 채우게 했다구. 한 줄도 여백이 있어선 안됐지. 못쓰겠다고 울면 단호하게 '들어가서 써' 라고 했어. 그럼에도 빠진 날이 있다면 월말까지 반드시 채워야했지. 카드값 독촉보다 혹독했달까.


대신 한달을 완성하면 레고시티 중 하나를 살 수 있었지. 6,7살 남자아이에게 레고시티란 빛 그 자체와 같았어. 그러니 일기와 레고의 교환은 합당했지.

images (2).jpg물론 이정도는 아니었고, 자동차 하나?


나중엔 꼼수를 썼어. 필사를 한거지. 어린 아이의 일상은 28줄 어치의 사건이 없었어. 하나의 사건을 그리 늘릴 어휘력도 없었지. 게다가 손으로 써야했으니 2B연필을 쥐고있던 중지손가락 첫째마디가 얼마나 시큰히 눌렸을거야.


당시엔 모든 집이 '백과사전' 하나쯤은 가지고 있을 때였어. 백과사전은 가나다순으로 적혀있고, ㄱ부터 적어내려갔지. '공룡'에 다다라서는 필사가 재미있을 지경이었어. 엄마는 내 필사를 이미 알고 있었지만 별 말을 하진 않았어. 앞뒤 한 두 문장을 일상적으로 대강 버무려놓은 꼼수도 눈감아줬지.


그렇게 6살부터 시작된 일기는 21살까지 이어졌어. 군대에선 연등이란 제도가 있는데, 그때에도 일기는 꼭 쓰고 자고 했거든. 분량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그냥 습관이었어.


일기가 글쓰기에 도움이 됐냐, 분명히 됐어. 하지만 분명히 해둘 건 일기를 쓰는 행위 자체가 주는 이득이 있고, 일기를 쓰기 위해 해야했던 필사의 이득이 있어. 그리고 일기를 씀으로써 생기는 '효과'도 있지. 이걸 좀 구분할 필요가 있을거야.


일기를 쓰는 행위는 손가락 힘을 길러줬어. 농담이 아냐. 문장을 써내려가는 문장력이라고 해야하나. 길든 짧든 주어와 서술어를 놓치지 않는 문장력은 써봐야만 길러지는 거거든.


일기 분량을 채우기 위해 억지로 베껴썼던 백과사전은 잡지식을 늘려줬고, 당시 필사를 해댔던 신경숙 작가님의 '기차는 7시에 떠나네'나 '바이올렛' 등은 나중에도 내 문체에 큰 영향을 줬어.


일기를 쓰면서 사물과 현상, 감정을 바라보고 묘사하는 힘도 생겼어. 이건 효과에 가까울거야. 작은 현상들을 4~5줄로 늘려써야했으니 괜시리 그걸 회고해보게 되거든. 게다가 어제와 비슷한 하루를 다르게 쓰려면 세밀한 것들을 느껴야 해. 흔히 다시 복기하면 감정이 정리될거라 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아. 대부분 순간에는 감정을 억누르는 경우가 많아서 복기할 때 오히려 터지더라고. 그래서 일기는 꽤나 지저분하고 공격적이었어. 다만, 쓰고난 후에 느껴지는 것들이 있긴 하지. 차분히 정리된 걸 기록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지만 그건 너무 귀찮아서 안했어.


수백권의 일기장이 있었는데 지금은 곰팡이가 많이 쓸었다고 하더라고. 뭐 사실 아깝진 않아. 난 지나간 기록에 그리 연연하진 않는 편이라, 인스타에 릴스 찍긴 좋겠지만 그걸 다시 뒤적여보고 싶진 않거든. 부끄럽기도 하고. 써왔던 것들이 길러놓은 지금의 모습이면 충분한 것 같어. 싫다는데 써보라고 권하고 싶진 않아.


레고를 사주는 누군가가 없다면 또는 일기가 이미 습관이 되어버린 사람이 아니라면, 사실 고되고 귀찮기 그지없는 일이거든. 그러나 이미 쓰고 있거나 쓰려고 마음을 먹었다면 그건 실력이 아니라, 관점으로 되돌아올거라 말해주고 싶어. 많은 사람들이 일기를 '훈련'처럼 생각하는데, 지금와 생각해보니 나를 '타자화'시키는 유일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해. 그래서 위로도 받고, 메타인지도 되고, 반성과 이불킥을 반복하기도 하는거지.

images (3).jpg어이... 과거의 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