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의 수많은 전기 작가들은 빈센트 반 고흐가 하나님을 버렸다고 마해 왔습니다. 그는 목사가 되려다 실패했고, 교단에서 쫓겨났습니다. 결국 미치광이처럼 고독 속에서 그림만 그린 사람으로 묘사합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절반만 맞고 절반은 틀렸습니다. 반 고흐가 버린 것은 형식으로 굳어버린 교회의 조직과 껍데기였습니다. 그는 어릴 적 목사인 아버지에게서 배운 신앙을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화려한 교회 건물은 떠났지만, 가난한 사람들을 향한 주님의 복음은 결코 버리지 않았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반 고흐가 매우 엄격한 '칼빈주의(Calvinism)' 가문에서 자랐다고 생각합니다. 1618년 도르트 회의(Synod of Dort)에서 확립된 이 교리는, 하나님이 구원할 사람을 미리 정해두었으며,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철저히 타락한 존재라고 가르쳤습니다.
하지만 에릭슨(Kathleen Powers Erickson)의 연구에 따르면 고흐는 칼빈주의에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의 집안은 항론파(Remonstrants)라고 불리는 신학 전통을 따르고 있었습니다. 17세기에 살았던 선조 코르넬리스 반 고흐(Cornelius van Gogh) 때부터, 네덜란드의 신학자 야코부스 아르미니우스(Jacobus Arminius)의 뜻을 따르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소위 아르미니우스주의라고 하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은혜가 모든 사람에게 열려 있고, 그것을 받아들일지 말지는 인간의 자유의지에 달려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반 고흐의 할아버지 역시 이런 자유로운 성향이 강했던 레이던 대학교(Leiden University)에서 신학을 공부했습니다. 아버지 테오도루스(Theodorus van Gogh)는 위트레흐트 대학교(Utrecht University)에서 공부했지만, 그는 '흐로닝언 신학(Groningen Theology)'이라는 길로 들어섰습니다.
흐로닝언 신학은 어떤 사상이었을까요? 이 신학은 조상들이 물려준 자유의지 사상을 바탕으로 깔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인간을 따뜻하게 바라본 에라스뮈스(Desiderius Erasmus)의 인문주의, 그리고 신앙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끼려 했던 슐라이어마허(Friedrich Schleiermacher)의 낭만적인 경건주의를 합쳐 놓은 독특한 사상이었습니다. 딱딱하고 차가운 교리보다는, 살아 숨 쉬는 인간의 마음과 사랑을 훨씬 더 중요하게 여긴 것입니다.
흐로닝언 신학은 머리로 외우는 교리보다 직접 경험하는 체험을 훨씬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이 학파를 이끈 신학자 흐로트(Petrus Hofstede de Groot)의 핵심 주장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종교는 마음의 내적 감정 속에 머문다(Religio habitat in sensu)."
여기서 말하는 감정은 가볍게 스쳐 가는 기분이 아닙니다. 영혼 전체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느끼는 것을 뜻합니다. 교회에서 정해놓은 복잡한 규칙을 달달 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신앙은 마음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직접 경험하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흐로닝언 신학은 예수를 단순히 '인간의 죄를 대신해 벌을 받은 희생양'으로만 보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똑같이 따라 살아야 할 완벽한 롤모델(본보기)'로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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