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뤼트허르 브레흐만의 『휴먼카인드』를 펼치며
만일 오늘 밤, 당신이 사는 도시 한복판에 수만 발의 폭탄이 쏟아진다고 가정해 보자. 전기와 수도가 끊기고, 경찰력마저 한순간에 마비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이웃끼리 식량을 차지하려고 서로 목을 조를까? 거리는 약탈과 방화, 광기로 뒤덮일까?
우리는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한다. 재난 영화, 뉴스, 그리고 우리가 배운 교과서가 늘 그렇게 가르쳐 왔기 때문이다. 문명이란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겨우 덮고 있는 얇은 포장지에 불과하다고 사람들은 믿는 것 같다. 위기가 닥치면 그 포장지가 찢어지고 내면의 야수가 튀어나올 것이라는 생각이다.
하지만 실제 역사 기록도 그럴까? 1940년 9월, 독일 공군은 영국 런던에 무자비한 공습(The Blitz)을 퍼부었다. 9개월 동안 무려 8만 개가 넘는 폭탄이 떨어졌다. 백만 채의 건물이 파괴되었고, 4만 명 이상의 런던 시민이 목숨을 잃었다.
공습이 시작되기 전, 영국 정부와 정신과 의사는 공황에 빠진 시민이 집단적인 정신 질환을 앓고 도시 전체가 폭력으로 통제 불능이 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래서 정부는 급히 정신병원 병상을 늘렸고, 패닉에 빠진 사람이 몰릴까 봐 지하 철도역을 폐쇄하려고 했다. 히틀러 역시 공포에 질린 영국 슬롯가 스스로 무너질 것이라 확신했다.
결과는 어땠을까? 전문가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폭탄이 쏟아지는 런던 거리에서 약탈이나 폭동은 일어나지 않았다. 범죄율은 오히려 크게 떨어졌다. 알코올 중독자와 자살하는 사람의 수도 줄었고, 꽉 찰 것이라던 정신과 병동은 텅 비었다.
재난 슬롯학의 선구자인 찰스 프리츠(Charles Fritz)의 연구는 이 현상을 정확히 설명한다. 그는 재난이 닥치면 사람들은 서로를 적으로 대하는 대신, 일상적인 슬롯적 장벽을 허물고 ‘고통의 공동체(community of sufferers)’를 형성한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런던 시민은 지하 방공호에 모여 낯선 이에게 차를 건네고 담요를 나누며 서로의 상처를 싸매주었다. 폭격으로 집을 잃은 이웃을 위해 기꺼이 자기 집 안방을 내주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미국 전략폭격조사단(United States Strategic Bombing Survey)이 독일에 가한 폭격의 효과를 분석했을 때도 결과는 같았다. 폭격을 가장 심하게 받은 도시일수록, 국민의 연대감과 저항 의지는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왜 우리의 예상은 언제나 빗나가는가? 극한의 위기 속에서도 서로를 돕는 인간의 진짜 모습을 우리는 왜 보지 못할까? 왜 우리는 인간을 이기적이고 잔인한 존재로만 그리는 어두운 신화에 중독되어 있는가?
오늘부터 시작하는 『행간(行間)을 묻다: 텍스트 너머를 보는 비판적 바카라읽기』의 첫 번째 여정은 바로 이 질문에서 출발한다. 전 세계 지성계를 뒤흔든 네덜란드의 사상가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의 대표작 『휴먼카인드: 감춰진 인간 본성에서 찾은 희망의 연대기』(Humankind: A Hopeful History)를 살펴보겠다.
먼저 저자인 뤼트허르 브레흐만(Rutger Bregman)이라는 인물을 알 필요가 있다. 1988년 네덜란드에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위트레흐트 대학교에서 역사를 전공한 역사가이자 저널리스트다. 그는 조회수만 노리는 자극적인 뉴스를 거부하고, 문제의 본질을 파고드는 네덜란드의 대안 언론 《드 코레스폰던트(De Correspondent)》의 창립 멤버로 활동하며 이름을 알렸다.
그가 전 세계 대중에게 강렬하게 각인된 결정적 사건은 2019년 1월, 스위스 다보스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이었다. 전 세계 억만장자와 정치 리더가 전용기를 타고 모여 ‘기부와 자선, 환경 보호’를 우아하게 논하던 그 자리에서, 서른 살의 젊은 역사학자는 마이크를 잡고 이렇게 일갈했다.
“전용기 1,500대가 날아와서 지구 환경을 구하자고 말하는 이 자리가 너무나 비현실적으로 느껴집니다. 마치 소방관 회의에 와 있는데 아무도 ‘물’을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입을 막고 있는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자선과 기부를 말하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단어는 입에 올리지 않습니다. 바로 ‘세금(Taxes)’입니다.”
부자가 정당한 세금을 내지 않으면서 자선을 이야기하는 모순을 정면으로 찌른 것이다. 행사장에는 찬물을 끼얹은 듯한 정적이 흘렀고, 이 연설 영상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는 어느 한 정치 진영의 입맛에 맞는 구호를 외치지 않는다. 대중이 애써 외면하는 불편한 진실과 역사적 데이터를 들이밀며 시대의 상식을 깨뜨리는 사상가다.
그는 전작 『리얼리스트를 위한 유토피아 플랜』을 통해 ‘모두에게 조건 없이 돈을 주는 기본소득’과 ‘주 15시간 노동’이라는 파격적인 화두를 던졌다. 그리고 이번에는 한 걸음 더 들어갔다.
“왜 사람은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는 희망을 믿지 않고 냉소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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