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백야에 눈먼 사랑이 있어

- 도스토옙스키의 『우리는 가장 밝은 밤에 헤어졌다』를 읽고

by김유이


"페테르부르크의 마음도 자신의 태양을 소중히 여깁니다. 하지만 슬픔 속에 무슨 환상이 있겠습니까! 환상도 결국 지친다는 것을, 마르지 않을 것 같던 환상도 끝없이 긴장하다가 말라간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가장 밝은 밤에 헤어졌다』는 도스토옙스키가 26세에 쓴 단편 『백야』를 현대적 감각으로 새롭게 선보인 작품이다. 해가 지지 않는 페테르부르크의 기묘한 '백야'를 배경으로 현실보다 공상에 익숙한 '몽상가'인 주인공이 우연히 만난 여성 나스텐카와 나눈 나흘간의 짧은 사랑을 그린다.


이름 없는 남자 주인공은 친구도 연인도 없이 도시 속에서 사람들을 관찰하고 상상하며 살아가는 몽상가다. 어느 백야의 밤, 운하 난간에 기대어 눈물 흘리는 여성을 발견하고, 낯선 사내의 위협으로부터 그녀를 구출해 낸다. 두 사람은 백야의 밤하늘 아래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기로 약속한다.


여기까지가 『백야』의 메인 스토리이다. 그런데 백야의 밤이라는 이 생경한 배경 속에서 주인공은 마치 핀 조명이 비추고 있는 무대 외곽의 있는 조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부분의 서술은 그가 하고 있지만 사실상 중심이 되는 이야기 속에서 그는 철저하게 나스텐카의 주위를 맴도는 조연이 될 수밖에 없다. '나'의 몽상가다운 생각과 문장들이 아름답고 수려했으나 서글펐던 것은 그 때문이다.


나스텐카는 맹인이 된 할머니와 함께 살며 답답했던 삶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소녀다. 그녀는 할머니의 하숙생이었던 청년을 연모하여 1년 뒤 그가 돌아오기를 기다려왔다는 가슴 아픈 사연을 털어놓는다. 주인공은 평생 처음으로 자신을 인간으로 바라봐 준 그녀에게 통제할 수 없는 사랑의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다.


주인공의 도움으로 나스텐카는 마침 돌아온 연인과 재회하지만, 주인공은 홀로 남는다. 평생 지속될 줄 알았던 꿈같은 로맨스는 단 나흘 만에 끝나고, 그는 원망하는 대신 자신을 스쳐 지나간 찰나 같은 사랑에 감사하며 평생을 살아갈 내면의 단단한 힘을 얻는다. 세상에서 가장 밝은 밤에 만났던 두 사람은 가장 서글픈 방식으로 헤어진다.


사랑을 알지 못했던 사람이 진정하다고 믿을만한 사랑을 알아가는 과정은 설레고 때로는 흐뭇했지만, 사랑이라는 것의 성질이 너무나 가변적이어서 영원히 '나'에게 있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 장면에서는 함께 휘청거렸다. 제목처럼 너무나 밝은 밤에 모든 것이 다 훤하게 드러나버린 '나'의 모습은 애처롭기까지 했다.


나흘간의 짧은 사랑은 너무 강렬해서 그의 삶 전체에 자리 잡을 것이다. 그는 평생 이때 느꼈던 감각들의 매료되어 그리워하고 그때의 자신이 누렸던 황홀감과 잠들 수 없었던 열망을 잊지 못할 것이다. 나 역시 짧은 단편이었지만 도스토옙스키가 보여주는 백야의 서늘하면서 선명한 날들의 매료되어 온통 눈앞이 환해졌다.


어떤 작품은 깊게 베인 상처처럼 마음을 가르고 폐부를 갈라서 회복하는 데 시간이 걸리고, 어떤 작품은 꿈에서 깬 것처럼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나를 데려간다. 어떤 방식이든 바카라을 읽는 행위를 통해 우리는 잠시 다른 사람으로 살아볼 수 있는 기회를 얻는다. 다른 사람으로서 다른 삶을 살아보며 나를 돌아본다는 말은 다소 식상할 수 있으나 배우가 된 것처럼 주인공의 대사를 읊어보고 그 길을 걷는 상상을 할수도 있으며, 백야로 온통 하얀 공간에서 정처 없이 사랑을 찾아 떠나는 존재가 되어 볼수도 있다. 그러니 잠시 현실에서 빠져나와 다른 세계로 뛰어들어 보는 건 어떨지.


"내가 그대의 밝고 구김 없는 행복에 먹구름을 드리울 것 같은가. 그대를 매섭게 비난하여 그대의 심장에 슬픔을 드리우고, 은밀한 가바카라으로 아프게 하고, 지극히 행복한 순간에도 심장이 미어지게 만들 것 같은가."


출처 : 교보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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