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끼셨다는데, 왜 통장은 비었을까

할인의 마술사

by돌부처

"R님, 장바구니 상품이 오늘 자정까지만 20% 추가 할인됩니다. 이 가격은 다시 오지 않아요. 지금 결제 시 총 87,000원 절약!"


점심시간에 R은 그 알림을 열었다. 처음에는 열 생각은 없었다. 다만 엄지가 알아서 움직였다. 장바구니에는 지난달에 담아두고 잊은 것들이 그대로 있었다. 운동화 한 켤레, 블루투스 이어폰, 왜 넣었는지 기억도 안 나는 텀블러. R이 원래 사려던 건 운동화뿐이었다. 그마저도 "나중에"라면서 넣었을 뿐이었다.


화면 아래엔 빨간 타이머가 돌고 있다. 11시간 42분. 옆에 작은 글씨로 '품절 임박'이 깜빡였다. R은 결제창까지 스윽 내려갔다. 총액 18만 원. 그 아래, 초록색으로 크게 박힌 문구. "오늘 구매하시면, 87,000원을 아끼시는거에요!"


R은 그 숫자를 보고 살짝 안심했다. 돈을 쓴 게 아니라 돈을 아낀 기분이 들었다. 결제 버튼을 눌렀다. 그날 밤 운동화는 발에 잘 맞았고, 이어폰은 잘 들렸고, 마스크는 서랍에 들어갔고, 텀블러는 싱크대 위에 놓인 채 며칠을 보냈다. 한 달이 지나 카드 명세서를 열었을 때, R은 그 달 생활비가 왜 이렇게 빠듯한지 한참을 들여다봤다. 영수증에는 "87,000원 절약"이라는 말이 어디에도 없었고, 결제 내역 18만 원만 있었지.




이 빌런은 앞의 애들이랑 결이 좀 달라. 약장수는 너를 겁주고, N잡 낭만주의자는 너를 응원하고, 텅장 미학자는 너를 포기시켜. 전부 네 감정을 한 바퀴 돌린 다음에 지갑을 열어. 근데 할인의 마술사는 감정 같은 거 안 건드려. 계산기를 건드려. 너한테 "이거 사는 게 이득이야"라고 설득하는 게 아니라, 네가 이미 이득을 봤다고 믿게 만들어. 결제 전에 이미 이긴 사람처럼 느껴지게. 모자 안에서 토끼를 꺼내는 게 아니라, 네가 쓴 돈을 아낀 돈으로 바꿔 보여주는 마술을 부리는 아주 나쁜 빌런이야.


마술의 재료는 아주 단순해. 두 개의 장부야. 하나는 네가 보는 장부고, 하나는 통장이 보는 장부야. R의 그날 장바구니를 두 장부로 다시 써볼게.


운동화. 정가 12만 원, 할인가 8만 4천 원. 절약 장부에는 +3만 6천 원이 찍혀. 통장 장부에는 -8만 4천 원. R이 원래 사려던 물건이니까, 이 한 줄만큼은 논란의 여지가 적어. 다만 정가 12만 원이 진짜 정가인지는 아무도 확인해 주지 않아. 석 달 전에도 8만 원대에 팔리던 신발이, 세일 기간에만 슬쩍 12만 원으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오는 경우, 업계에서는 놀랍도록 흔해. 네가 비교하는 기준점 자체가 연극 소품일 수 있다는 얘기야. 앵커 가격. 배에 닻을 내리면 배가 그 근처를 맴도는 것처럼, 네 머릿속도 그 가짜 정가 근처를 맴돌아. 8만 4천 원이 싸게 느껴지는 건 신발이 싸서가 아니라, 옆에 놓인 12만 원이 비싸 보이도록 설계돼 있어서야.


지금 바로 작가의 멤버십 구독자가 되어
멤버십 특별 연재 콘텐츠를 모두 만나 보세요.

brunch membership
돌부처작가님의 멤버십을 시작해 보세요!

읽고 쓰는 사람. 커리어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소설을 씁니다.

801 구독자

오직 멤버십 구독자만 볼 수 있는,
이 작가의 특별 연재 콘텐츠

  • 총 190개의 혜택 콘텐츠
최신 발행글 더보기
카지노 게임의 이전글자기 계발로 부업과 자유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