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높인건 생산성일까 두통 발병률일까
"다들 내가 준 리포트 읽어 봤어요?"
오늘도 아침 일찍부터 이 부장의 잡도리가 시작되었다. 자신의 기대만큼 업무 속도가 나지 않자, 직원들을 들들 볶는 것이었다. 그 중에서도 하이라이트는, 회의 때마다 언급되는 그놈의 '보고서'였다.
그 보고서로 말할 것 같으면, 이 부장이 직접 만든 무려 177쪽짜리 야심작이었다. 주말에 출근해 AI와 씨름하며 만들었다며, 입에 침을 튀기며 한참동안 자랑을 했다. 마치 백과사전처럼 그것만 보면 모든 비지니스를 이해할 수 있다나 뭐라나. 아무튼 직원들 반응이 뜨뜻미지근한 걸 눈치채고는, 만날 때마다 닦달하며 읽어봤냐고 물었다.
물론, 당연히 아무도 읽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처음 몇 쪽은 감탄하며 읽다가 결국 포기했다. 내용이 나쁜 건 아니었다. 다만 우리는 177쪽을 다 읽을 시간이 없는 바쁜 온라인 게임인들이었다.
회의가 끝난 후 최 과장이 회의록을 정리해 메일로 보냈다.
'띠링' 알림 소리에 메일함을 열자마자, 머리가 지끈거린다. 30분 남짓한 짧은 회의였는데, 내용은 왜 이토록 구구절절한건지. 모르는 사람이 보면 중대 사항으로 3박 4일 토론한 내용으로 오해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건 최 과장 개인의 문제는 아니다. 요즘 회의록이나 이메일 내용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겉으로는 예쁘고 깔끔하게 정리된 것처럼 보이지만, 지나치게 길고 내용도 많다. 막상 읽어보면 무슨 소린가 싶다.
PPT 발표 자료도 마찬가지다. AI의 도움으로 회의록이나 발표 자료가 획기적으로 발전했다. AI만 잘 쓸줄 알면, 1시간 안에 보고 자료 하나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멋지게 디자인된 템플릿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화려한 겉껍질을 한꺼풀만 벗겨 보면, 밑천이 드러난다. 미사여구와 도식으로 범벅되었지만 알멩이는 속 빠졌음을 금방 알 수 있다.
AI는 온라인 게임인의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개선해 주었다.
아마 앞으로는 더 많은 효율을 가져다줄 것이다. 기존 1시간 걸리던 업무가 10분으로 줄어든 건 기본이고, 잘 모르던 업무도 AI와 함께하면 어느정도 할만하다.
그러나 주변의 많은 온라인 게임인들은 벌써부터 AI에 대한 피로감을 호소한다. 모두가 AI를 사용하고 있지만, 모든 사람이 AI를 사용한 결과물을 좋아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생각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AI로 만든 결과물에 내용이 제대로 녹여 있지 않아서다. 중요한 결론이나 의사 결정 사항은 빠진 채 빙빙 겉도는 이야기만 있는 보고서, 다음 실행 계획 없이 회의 내용만 장황하게 써 있는 회의록, 디자인은 화려한데 숫자 검증이 안 된 자료를 쓴 PPT 등. 이런 자료에 대한 검증은 고스란히 그걸 받아 보는 사람의 몫이 된다. 작성하는 것보다, 보고 읽고 고치는 데 시간이 더 든다.
두번째 이유는 '줄이지 않아서'이다.
회사에서 중요한 자원 중 하나는 시간과 돈이다. 어찌보면 시간과 돈은 같은 개념일 때도 많다. 바쁜 상사는 왠만해선 길게 쓴 이메일을 선호하지 않는다. 자신이 바로 보고 알 수 있도록 짧게 요약된 자료를 선호한다. 그 외 필요한 사항들은 참고자료로 첨부하면 된다. 그래야 잠깐 보고도 자신이 어떤 결정을 내리면 될지, 어떤 지원을 해야 할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것보다 중요한 것이 '덜어내는 것'이다.
물론 AI도 이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 충분히 AI로 요약해 두괄식으로 자료를 정리할 수 있다. 다만 AI가 주는 화려한 결과물에 현혹되어, 그 기능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할 뿐이다.
AI와 함께 살아가는 시대가 펼쳐졌다. 역설적이게도 이런 시대에 가장 필요한 온라인 게임인의 능력은 어쩌면 AI를 잘 활용하는 것보다 '사람'에 대한 배려가 아닐까 싶다. 이 결과물을 받아볼 사람이 한 눈에 결과를 예측하게 하고, 그의 시간을 줄여주는 기본적인 배려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