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만원 호텔 런치보다 맛있는 1만원 짜리 국밥

회식에서 중요한 건 뭐다?

by수풀림

"그럼요, 가능합니다. 저희가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호호호, 잘 부탁드립니다."

VIP 고객과 식사 자리. 얼굴에는 환한 비지니스 미소를 장착하고, 머릿속으로는 끊임없이 다음 이야기를 떠올렸다. 고객의 말 한마디, 작은 표정 변화까지 놓치지 않으려 최대한 집중하는 것은 물론이다.

그 사이 두 번째 메뉴가 서빙되었다.

"새우살을 다져 망고 쳐트니와 섞은 타르타르입니다. 곁들인 소스는 고흥 유자를 베이스로 한 뵈르 블랑이고, 위에는 캐비아와 마이크로 허브를 올렸습니다."

근사한 비주얼, 처음 들어보는 소스 이름. 배도 고프고 맛도 궁금해 빨리 먹어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은데, 고객은 아까 했던 얘기를 이어서 했다. 도무지 끝날 기미가 안 보였다. 눈치를 보며 겨우 한 입 먹은 순간, 다음 코스를 위해 접시를 치운다고 했다. 비싼 음식이 순식간에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아, 그림의 떡이란 게 이런 거구나.


"아니, 오늘 호텔 코스 요리 먹고 왔다며?"

집에 가자마자 허겁지겁 먹을 것을 찾는 내게 남편이 물었다. 나는 냉동 만두를 우물거리며 답했다.

"비싼 거 먹으면 뭐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하나도 모르겠던데."

그는 내게 배부른 소리 한다며 면박을 주었지만, 정말 진심이었다. 최고급 안심으로 만든 스테이크가 메인 요리로 나왔는데, 무슨 맛인지 느낄 수 없었다. 좋아하는 와인을 계속 따라줬지만, 고객의 속도에 맞춰 마시느냐 취하지도 않았다. 메뉴판에 써있는 글씨를 읽을 틈도 없었고, 빨리 이 자리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나오면서 계산서를 보니 1인당 17만원이 넘는 금액이 찍혀 있었다. 요리가 여러 개 나온 건 생각나지만, 무엇을 어떻게 먹었는지 잘 떠오르지도 나지 않았다. 심지어 메인 요리에 곁들인 사이드 메뉴를 먹다가 사레들려 고객 앞에서 실수할 뻔 했다.

생각해보면 VIP 고객이나 회사 리더십과의 식사는 늘 그랬다. 고급스럽고 비싼 음식이 눈앞에 있어도, 도무지 맛을 즐길 수가 없었다. 불편하고 얹힌 느낌으로 집에 돌아온 기억이 더 생생하다.


다음 날, 동료들과 회사 앞 국밥집에 갔다.

서울에 있지만 아직도 착한 가격으로 순대국을 파는 곳이다. 동료 A는 이곳을 정말 사랑한다.

"여기 이 양념장이랑, 고추 다진거랑, 들깨가루 섞어봐봐. 이거 찍어 먹으면 기가 막히다니깐."

그가 추천한 특제 소스를 다같이 만들며,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이어갔다. 숨겨 놓은 비상금을 와이프에게 들킨 일화, 아이가 등교 거부를 하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냐는 상담, 주말에 있을 소개팅에 대한 꿀팁 등등. 10분도 되지 않아 한국인의 패스트 푸드인 국밥이 나왔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뽀얀 국물에는 순대 몇 알, 머릿고기 몇 점이 들어있다. 자주 먹는 음식이지만 오늘따라 더 맛있게 느껴진다. 그 비싼 호텔 코스 요리를 먹을 때는 미처 몰랐던 미각이 되살아났다. 동료가 추천한 소스도 맛있고, 별 거 안 들은 당면순대조차 맛있다. 아삭한 깍두기, 구수한 들깨 가루도 찰떡 궁합이었다. 회사 앞 순대국이 이렇게 맛난 음식이었나?

동료들과 수다를 반찬삼아 먹다 보니 어느새 점심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대체 왜 그럴까, 곰곰이 그 차이를 생각해봤다.

역시나 결론은 사람. 회사에서 밥을 먹을 때 가장 중요한 건, 메뉴가 아닌 멤버 아닐까. 회식을 할 때도 가장 중요한 게 자리 선점인 것과 같은 이치다. 부장님 옆에서 밥을 먹으면 체할 것 같지만, 친한 사람들과 함께 하면 새우깡에 소주조차 맛있으니 말이다.

누구와 먹느냐에 따라 같은 한 시간이 천국이 되기도, 지옥이 되기도 한다. 고객과 함께하는 17만원짜리 호텔 코스 요리는 업무의 연장이었지만, 동료와1만원짜리 순대국밥은 순수한 즐거움 그 자체다. 아마도 비싼 식사에는 목적과 대가가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관계를 만들거나, 무언가를 부탁하거나, 중요한 이야기를 나누는 목적 말이다.

반면 회사에서 먹은 정말 맛있었던 밥들은 전혀 목적성이 없다. 함께 모여서 허기를 채우고 이야기를 하는 그 정도? 그래서 요즘은 이런 생각도 든다. 회사생활에서 꽤 괜찮은 복지는 좋은 밥을 주며 일을 시키는 게 아니라, 아무 목적 없이 밥 한 끼 먹을 사람이 있는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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