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도, 악마도 아닌 그냥 한 사람
얼마 전 들러리로 참석한 미팅에서, 평소 보기 힘든 광경을 목격했다.
최근 한 달간 작성한 장기 사업계획서를 글로벌 팀에 발표하는 자리였다. 한국을 비롯한 각 나라 지사장, 아시아 총괄 사장, 아시아 전략 헤드 등이 참석했다. 순서대로 아시아 사장이 전체 계획을 설명하고, 이어서 각 나라별 발표가 이어지는 흐름이었다. 아시아 사장은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첫 장표를 설명하기 시작했고, 채 1분도 지나지 않아 글로벌 리더가 외쳤다.
"Wait, stop. What are you trying to talk about?"
잔뜩 찌푸린 인상으로 말허리를 잘라 버렸다. 그의 표정과 말투로 짐작컨데, 아마 이런 말을 하고 싶었던 것 같다. '장표 멋지게 만들고 장황하게 설명해봤자 나한텐 소용없다. 그래서 요점이 뭔데?'
당황한 아시아 사장은 얼버무리며 대답했지만, 글로벌 리더는 마음에 안 들었나보다. 그 뒤로도 몇 번의 공격이 이어지자, 아시아 사장의 얼굴이 빨개지고 이마 땀이 송글송글 맺히는 게 화면 너머로 느껴졌다.
아시아 사장으로 말할 것 같으면, 빌런 같은 존재였다.
각 나라 지사장에게 매번 쓴소리만 하고, 자기는 아무것도 안했으면서 공로는 쏙 채 가는. 그런 그가 벌벌 떨며 제대로 말을 못 하는 장면은 한편으로는 충격이었고, 한편으로는 고소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발표 장면을 계속 지켜보자니 마음이 조금 복잡해졌다. 아시아 사장 뿐 아니라 줄줄이 나라별 지사장도 펀치를 얻어 맞고 어버버하는 상황이었다. 우리 사장님도 무섭기로는 저리가라 하는 분이었지만, 최종 보스 앞에서는 소용 없었다. 그들이 당황해하는 모습은, 내가 사장님한테 혼날 때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대단해 보였던 리더도 결국 그냥 사람이었구나.'
내가 그날 목격한 그들의 모습은, 평소 내가 알고 있던 그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들은 언제나 비전을 제시하고, 구성원들의 능력을 판단하고, 잘못을 지적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나와 똑같이, 상사에게 공격을 당하면 방어적인 태도를 보이고, 리더가 더 큰 미래를 말하면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대답하는 구성원의 일부였던 것이다.
영혼까지 탈탈 털린 그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리더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되었다.
왜 매번 그렇게 구성원들에게 더 높은 성과 목표를 요청하는지,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키메시지가 무엇인지부터 물어보는지 말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잘못된 행동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화가 난다고 소리를 지르고, 구성원들을 소모품처럼 대하며, 자신의 불안을 다른 사람에게 떠넘기는 행동은 분명 리더가 깨닫고 고쳐야 한다.
다만 그날 이후로 나는 리더를 조금은 다르게 보게 되었다. 그들은 완벽해서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 아니라, 그렇게 되기 위해 오래 애써온 사람들일지도 모른다. 강한 말투 뒤에는 들키고 싶지 않은 불안이 있고, 과한 자신감 뒤에는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숨어 있을지도 모른다. 그들을 위대한 영웅이나 악마 같은 빌런으로만 보면, 나는 그들의 말 한마디에 너무 쉽게 흔들린다.
반대로 그들도 걱정이 많고, 칭찬받고 싶고, 누군가 앞에서는 작아지는 한 사람이라고 보면 조금은 다르게 보인다. 깊은 이해는 그들에 대한 면죄부가 아닌, 한 사람으로서의 리더를 해석하기 위한 도구일 수 있다.
리더도 결국 사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