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는 최근 「4년 후엔 전국이 실리콘밸리?…너도나도 ‘반도체·AI 유치’ 공약」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실었다. 기사에 따르면 전국 광역단체장 후보 상당수가 반도체 공장, AI 산업단지, 데이터센터 유치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정작 기사에 등장하는 내용은 대부분 산업단지와 데이터센터 이야기다.
데이터센터는 실리콘밸리의 핵심이 아니다. 오히려 실리콘밸리에서는 데이터센터 확장을 둘러싼 전력 부족과 환경 갈등이 커지고 있다. 실리콘밸리 중심지인 산타클라라에서는 전력 연결이 지연돼 완공된 데이터센터가 비어 있는 사례까지 등장했다. 대형 AI 데이터센터가 급증하면서 전력망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실제 미국의 주요 데이터센터는 실리콘밸리보다 전력과 부지가 풍부한 텍사스, 애리조나, 네바다 등으로 이동하는 추세다. 즉 데이터센터는 AI 산업의 기반 시설일 수는 있어도, 실리콘밸리라는 창업 생태계의 본질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그럼에도 정치권과 미디어는 실리콘밸리를 이러한 기반 시설 중심의 '첨단산업 도시' 정도로 이해한다. 반도체 공장과 AI 데이터센터만 유치하면 실리콘밸리가 만들어진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본고장 미국에서조차 데이터센터가 외곽으로 밀려나는 현실을 고려할 때, 이 접근은 실리콘밸리가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은 데서 출발한다.
실리콘밸리는 반도체 도시도, 데이터센터 도시도 아니다. 본질은 벤처캐피털 중심의 창업 생태계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벤처캐피털이 창업을 조직하고 성장시키는 독특한 금융·문화 시스템이다.
세계 곳곳에 스타트업 도시가 있다. 대부분은 지역 산업에서 자연스럽게 파생된 창업 생태계다. 독일은 제조업 기반 위에서 산업 스타트업이 성장했고, 북유럽은 디자인과 콘텐츠 산업에서 창업이 발전했다. 일본 역시 지역 제조업과 콘텐츠 산업이 창업 생태계의 기반이다.
실리콘밸리 역시 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제2차 세계대전과 냉전기 연방 정부의 막대한 국방 연구개발 자금, 즉 방위산업이라는 강력한 지역적 기반에서 파생되었다. 더 구체적으로, 스탠퍼드 대학, 냉전기 국방 연구개발, 벤처금융, 그리고 캘리포니아 특유의 자유주의 문화가 수십 년 동안 축적되며 형성된 역사적 산물이다. 산업단지를 만든다고 자동으로 실리콘밸리가 탄생하지 않는 이유다.
실리콘밸리의 가장 큰 차별성은 독특한 창업 생태계다. 벤처캐피털이 돈만 투자하지 않는다. 창업자를 연결하고, CEO를 추천하고, 엔지니어를 붙이고, 후속 투자까지 설계한다. 정부나 대기업이 주도하는 일반적인 산업 클러스터와 달리,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은 사실상 새로운 기업을 함께 만드는 수준으로 창업 과정에 개입한다.
이 모델은 미국에서도 예외적이다. 실리콘밸리 이후 수많은 도시와 국가가 이를 모방하려 했지만, 완전히 성공한 사례는 거의 없다. 하버드대 경영대학원의 조시 러너(Josh Lerner) 교수는 오래전부터 정부 주도의 ‘실리콘밸리 만들기’ 프로젝트가 반복적으로 실패한다고 지적해 왔다. 그는 많은 국가가 벤처캐피털 산업의 결과만 모방하려 한다고 비판한다. 정부 펀드를 만들고 산업단지를 조성하지만, 정작 실리콘밸리를 움직이는 실패 허용 문화, 민간 투자 네트워크, 연쇄 창업, 개방적 인재 이동 같은 핵심 조건은 재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 역시 결과를 모방하는 데 집중하는 경향이 강하다. 정부와 대학이 창업지원센터와 펀드를 만들고, 입주 공간과 보조금을 제공한다. 하지만 실리콘밸리를 움직인 핵심은 지원 제도가 아니라, 실패를 감수하면서 반복적으로 창업에 도전하는 문화와 이를 받아들이는 슬롯 분위기였다.
흥미로운 점은 실리콘밸리가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고밀도의 유기적인 전통적 의미의 “도시”와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팰로앨토, 멘로파크, 마운틴뷰, 쿠퍼티노, 새너제이로 이어지는 공간은 기본적으로 고속도로망을 따라 넓게 분산된 저밀도 교외 지역이다. 사람들은 자동차로 이동하고, 넓은 캠퍼스형 오피스에서 일한다. 구글, 애플, 메타의 본사는 모두 도시 중심가보다 교외 캠퍼스에 가깝다.
실리콘밸리는 장인도시도 아니다. 중세 도시처럼 골목에서 장인과 상인이 밀집하며 혁신이 일어난 구조가 아니다. 오히려 “도시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성공한 창업 생태계”에 가깝다. 그래서 실리콘밸리는 일반적인 도시 모델로 수출하기 어렵다.
오히려 샌프란시스코가 도시 모델에 가깝다. 최근 AI 시대 들어 창업 생태계의 중심이 샌프란시스코 도심으로 이동하고 있다. 오픈AI, 앤트로픽 같은 AI 기업은 샌프란시스코 도심에 자리 잡고 있다. AI 스타트업들도 금융지구보다 미션, 소마, 디자인디스트릭트 같은 혼합용도 지역으로 이동 중이다.
이곳에는 카페, 바, 코워킹 공간, 로컬 식당, 작은 오피스가 밀집해 있다. 창업자와 디자이너, 엔지니어가 걸어서 만나고, 카페에서 일하고, 밤늦게까지 토론한다. 이 생태계는 훨씬 도시적이다. 실제로 오늘날 AI 스타트업은 과거처럼 거대한 교외 오피스파크보다, 밀도 높은 도시 환경을 더 선호하는 경향을 보인다.
첫째, 실리콘밸리 자체를 복제하려는 발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반도체 공장과 데이터센터를 유치한다고 실리콘밸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실리콘밸리의 핵심은 공장이 아니라 벤처금융과 창업 문화다.
둘째, 현실적인 대안은 지역 혁신 시스템과 벤처캐피털을 연결하는 모델이다. 대덕연구단지, 판교, 성수동처럼 기존 산업과 지역 기반 위에서 창업 생태계를 만드는 편이 훨씬 현실적이다. 실제 세계 대부분의 성공 사례도 이런 구조다. 벤처캐피털이 직접 창업을 지도하고 설계하는 실리콘밸리 모델은 다른 도시가 쉽게 수입하기 어렵다. 오히려 지역 산업과 대학, 연구기관, 로컬 기업 위에 벤처금융을 연결하는 방식이 현실적인 대안에 가깝다.
셋째, 미래에는 크리에이터 기반 창업 생태계가 중요해질 가능성이 크다. 지금의 스타트업 정바카라은 기술창업 중심이다. 하지만 앞으로는 “크리에이터 → 브랜드 → 법인 창업 → 스케일업”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경로가 중요해질 수 있다.
아직 크리에이터 창업 생태계는 개발된 적이 없다. 특히 오프라인 크리에이터와 결합하면 훨씬 도시적인 창업 모델이 가능해진다. 패션, F&B, 공예, 디자인, 로컬 콘텐츠 브랜드는 특정 동네와 함께 성장한다. 자동차 교외형 생태계보다 걷는 도시와 훨씬 잘 어울린다. '기술의 밀도’에서, 동네와 거리가 주도하는 ‘문화의 밀도’로 창업의 패러다임이 전환됨을 의미한다. 어쩌면 미래의 창업 생태계는 실리콘밸리보다, 도쿄의 동네나 파리의 거리, 혹은 서울의 성수동에 더 가까울지도 모른다.
실리콘밸리는 분명 세계 최고의 창업 생태계다. 하지만 동시에 매우 특수한 역사적 예외다. 모든 도시가 실리콘밸리가 되려고 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각 도시가 자기만의 도시적 창업 생태계를 어떻게 만들 것인가다. 그리고 그 생태계는 반도체 공장보다, 동네와 문화와 라이프스타일에서 시작될 가능성이 더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