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라쇼드퐁, 예외가 규칙을 증명한다

스위스 라쇼드퐁, 예외가 규칙을 증명한다


산업슬롯는 도시를 필요로 했는가

현대 도시학은 도시를 경제 성장의 핵심 플랫폼으로 설명한다. 혁신은 도시에서 발생하고, 창업은 도시에서 성장하며, 문화와 창조성 역시 도시적 환경 속에서 형성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19-20세기 산업화 시대 전체를 돌아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았다.


산업혁명 이후의 경제는 의외로 현대적 의미의 도시가 없이도 상당 부분 작동할 수 있었다. 산업슬롯의 핵심은 생산 효율성과 물류 체계였다. 공장은 항만과 철도 주변에 세워졌고, 산업은 공업지대와 교외 산업단지를 중심으로 성장했다. 도시의 역할은 노동력 공급과 주거 기능에 가까웠다.


실제로 산업혁명기의 영국 공업도시나 독일 제조업 지대, 미국의 대기업 경제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도시적 창조 생태계’와는 거리가 멀었다. 산업슬롯 도시의 핵심 구조는 기능 분리였다. 공장은 공장지대에, 주거는 주거지에, 상업은 상업지구에 배치됐다. 효율은 높아졌지만 도시 자체가 창조성과 생활의 플랫폼으로 작동하지는 않았다.


독일은 산업슬롯 전통을 유지한다. 산업강국이었지만 도시에 대한 태도는 오히려 반도시적 성격이 강하다. 상류층과 전문직 계층은 대도시보다 전원형 소도시와 저밀도 생활환경을 선호했다. 미국 역시 실리콘밸리가 등장하기 전까지는 도시가 혁신 플랫폼이라는 인식이 강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보면 산업슬롯는 어쩌면 ‘도시 없는 경제’의 시대였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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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을 위해 설계된 도시

그런데 산업슬롯 역사에는 이 흐름에서 벗어난 이상한 도시들이 존재한다. 산업을 위해 도시를 활용했던 도시들이다. 스위스의 작은 시계 도시 라쇼드퐁은 그런 사례다.


오늘날 라쇼드퐁은 세계 시계 산업의 수도로 알려져 있다. Rolex, Omega, Tissot 같은 브랜드들이 이 지역과 연결돼 있다. 하지만 이 도시의 진짜 의미는 명품 브랜드가 아니다. 라쇼드퐁은 도시 자체를 산업 시스템으로 설계했던 매우 드문 사례였다.


라쇼드퐁의 출발은 다른 유럽 시계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시계 제조 장인 다니엘 장리샤르(Daniel Jeanrichard)가 도제 양성과 가내수공업 방식으로 시계 제조업을 확산시켰고, 도시 주변 농가와 작은 작업장들이 시계 부품 생산에 참여했다. 초기 라쇼드퐁은 중세 유럽 도시처럼 불규칙한 골목과 목조 건축물이 밀집한 전통 도시 구조에 가까웠다.


그러나 18세기 후반 대형 화재가 도시를 완전히 바꾸었다. 라쇼드퐁은 화재 이후 이전 모양으로 복구되지 않았다. 도시 전체가 시계 산업에 최적화된 형태로 재설계됐다. 대부분의 산업슬롯 도시가 산업을 도시 외부에 배치했다면, 라쇼드퐁은 도시 자체를 산업 공간으로 바꾸었다.


왜 시계산업은 도시를 필요로 했는가

라쇼드퐁이 예외적 도시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당시 시계산업의 구조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세기 시계산업은 단순 조립 노동 중심의 공장 산업이 아니었다. 시계 제조는 극도로 정밀한 장인 노동에 기반한 산업이었다. 스프링, 기어, 케이스, 보석 세공, 인그레이빙 등 수백 개의 작은 부품과 공정을 수작업으로 다뤄야 했고, 공정마다 전문 장인이 필요했다.


중요한 것은 이 산업이 거대한 공장 하나로 운영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스위스 시계산업은 ‘에타블리사주(établissage)’라고 불리는 분업 체계 위에서 성장했다. 이는 여러 전문 장인과 소규모 공방들이 분산적으로 부품을 생산하고, 마지막 단계에서 조립업자가 이를 통합하는 구조였다. 즉, 시계산업은 처음부터 도시적 네트워크 산업이었다.


따라서 작은 공방들은 서로 가까이 있어야 했다. 부품과 기술, 정보와 인력이 빠르게 이동해야 했기 때문이다. 산업단지보다 골목과 생활권이 더 중요했던 이유다.


그래서 라쇼드퐁의 도시 구조도 일반적인 산업도시와 달라졌다. 도시계획자들은 교통 체증을 최소화하고 부품 운반을 원활하게 하기 위해 당시 기준으로 매우 넓은 도로와 직선형 격자 구조를 채택했다. 그 결과 도시는 현대적 그리드(grid) 구조를 갖게 된다.


하지만 핵심은 단순한 격자형 도시가 아니라 그 안의 생활 구조였다. 격자형 거리 안에는 시계 공방과 노동자 주택, 상점과 작업장이 함께 배치됐다. 공장지대와 주거지가 분리되지 않았다. 장인과 노동자들은 골목 안에서 살고 일했다.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직주락 복합도시였다.


건축물 역시 장인 산업 논리를 반영했다. 시계 제조는 정밀 작업이 중요했기 때문에 햇빛이 많이 필요했다. 그래서 공방 건물과 주택에는 큰 창문과 지붕 채광창이 설치됐다. 저층 건물 위주의 도시 구조 역시 채광과 작업 효율에 유리했다. 즉, 도시 디자인과 건축 자체가 시계 산업의 생산 시스템으로 작동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이 도시에서 세계 최고 수준의 첨단 산업이 탄생했다.


19세기말 라쇼드퐁은 세계 시계 생산량의 절반을 담당할 정도로 성장했다. 세계적 산업 경쟁력이 초고층 업무지구나 거대한 산업단지가 아니라, 저층 골목 도시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예외가 규칙을 증명한다

물론 라쇼드퐁은 산업슬롯 전체를 대표하는 사례는 아니다. 오히려 예외에 가까웠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중요하다. It may be an exception that proves the rule.


라쇼드퐁은 산업슬롯 대부분의 도시가 왜 창조성과 생활, 산업을 결합하지 못했는지를 거꾸로 보여준다. 대부분의 산업도시는 생산 효율만 추구했고, 도시를 단지 노동력 수용 공간 정도로 취급했다. 반면 라쇼드퐁은 산업과 생활과 건축을 하나의 시스템으로 통합했다.


이 차이가 도시의 성격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지금, 탈산업슬롯와 AI 시대에 들어오면서 이 ‘예외적 도시 모델’이 오히려 미래형 도시로 다시 등장하고 있다.


탈산업슬롯는 왜 다시 도시를 필요로 하는가

오늘날 경쟁력을 갖는 도시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다. 산업단지보다 골목이 강하다. 초고층 업무지구보다 생활권이 강하다. 거대한 계획보다 작은 관계망이 강하다.


샌프란시스코의 미션 디스트릭트, 베를린의 크로이츠베르크, 도쿄의 시모키타자와 같은 지역들은 산업시설이 아니라 도시적 분위기와 생활 구조 자체가 창조 생태계를 만들었다. 중요한 것은 산업 자체가 아니라 산업이 발생하는 도시 환경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바로 이 지점에서 새로운 질문들이 시작된다.

왜 유럽은 산업화 이후에도 골목과 저층 도시를 유지했는가.

왜 일본은 현대화 이후에도 도시의 생활 구조를 해체하지 않았는가.
왜 많은 신도시는 기능은 있지만 '도시'가 되지 못했는가.
왜 성수동 같은 골목 산업지구는 계획 산업단지보다 더 강한가.
왜 소멸지역은 산업단지 경쟁이 아니라 건축환경 경쟁으로 가야 하는가.
왜 AI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더 도시적인 공간을 찾게 되는가.


라쇼드퐁은 19세기 산업도시의 전형이 아니다. 산업슬롯에서는 예외였지만, 어쩌면 탈산업슬롯에서는 표준이 될지도 모르는, 예외가 규칙을 증명하는 도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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