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세도시, 산업도시, 장인도시, 창조도시, 크리에이터 타운
오늘날 세계의 많은 도시가 '도시를 만든다’고 말한다. 신도시를 개발하고, 산업단지를 조성하고, 문화지구를 계획하고, 스타트업 생태계를 구축한다.
하지만 새롭게 만들어지는 모든 도시가 사람들이 선망하는 도시로 기능하는 것은 아니다. 기능은 있지만 머물고 싶지 않은 도시도 많고, 산업은 있지만 창조성이 발생하지 않는 도시도 많다.
반대로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도시들은 공통적으로 골목과 생활권, 문화와 관계망, 장인과 창작자 생태계가 살아 있다. 도시학에서는 이러한 도시를 ‘창조도시(Creative City)’라고 부른다.
결국 중요한 질문은 이것인지도 모른다. 무엇이 공간을 창조도시로 만드는가. 왜 어떤 곳은 산업시설과 기능을 갖추고도 창조도시가 되지 못하고, 어떤 곳은 오래된 골목과 저층 건축물만으로도 사람과 산업, 문화와 공동체가 결합된 창조도시로 발전하는가.
이 글은 중세도시, 산업도시, 보헤미아, 장인도시, 그리고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창조도시와 최근의 크리에이터 타운까지의 흐름을 따라가며, 무엇이 진짜 도시를 만드는 가를 살펴본다.
중세도시(Medieval City): 생산과 생활이 결합된 도시
산업혁명 이전 유럽의 중세도시는 생산과 생활이 결합된 도시였다. 장인들은 골목 안에서 살고 일했고, 공방과 상점, 시장과 주거가 함께 존재했다. 경제와 공동체, 생활과 생산이 분리되지 않았다. 도시 자체가 하나의 생산 시스템으로 작동했다.
루이스 멈포드(Lewis Mumford)는 그의 마스터피스인 《도시의 문화(The Culture of Cities)》와 《역사 속 도시(The City in History)》에서 이러한 중세도시를 인간 규모(Human scale)의 유기적 도시로 높이 평가했다. 그에게 중세도시는 공방과 주거, 광장과 시장이 걸어서 닿는 거리 안에서 단단한 공동체를 이루던 공간이었다.
멈포드는 현대 산업문명의 근본적인 문제가 단순한 기술 발전의 부작용이 아니라, 이렇듯 생산과 생활, 그리고 공동체를 하나로 묶어주던 중세적 공간 질서를 해체해 버린 데서 기인했다고 보았다.
산업도시(Industrial City): 산업슬롯 도시 시스템의 형성
이러한 중세도시의 유기적 통합성이 해체된 자리에 들어선 것이 바로 근대 산업도시다. 루이스 멈포드는 일찍이 그의 첫 저서인 《유토피아 이야기(The Story of Utopias)》에서 근대 산업문명이 만들어낸 기형적인 공간 질서를 날카롭게 고발했다.
그에 따르면, 현대인들은 더 이상 인간적인 공동체를 꿈꾸지 않고 산업슬롯의 시스템이 강요한 거대한 ‘집단적 신화’ 위에서 살아간다. 멈포드는 이 시스템을 지배하는 현대의 왜곡된 도시 유형으로 컨트리하우스(Country House), 코크타운(Coketown), 메갈로폴리스(Megalopolis)를 제시했으며, 이 세 구조가 결합된 전체를 내셔널 스테이트(National State)라는 하나의 산업슬롯 도시 시스템으로 이해했다.
컨트리하우스는 귀족과 지배계층의 소비 중심 공간이었다. 문화와 예술은 공동체 속에서 생산되기보다 소유와 과시의 대상이 되었다. 컨트리하우스는 귀족과 지배계층의 소비 중심 공간이었다. 오늘날의 초고급 주거단지, 게이트 커뮤니티, 고급 소비 중심 신도시를 컨트리하우스의 연장선으로 볼 수 있다.
코크타운은 영국의 맨체스터 같은 산업혁명기의 전통적 산업도시였다. 공장과 노동자 주거지가 대규모로 조성되었고, 철도와 항만, 공업지대가 도시 구조를 지배했다. 생산 효율과 기능 분리가 도시 운영의 핵심 원리가 되었으며, 생활과 공동체보다 산업 시스템 자체가 우선시되었다.
메갈로폴리스는 이러한 산업문명을 통합하고 통제하는 중심 도시였다. 영국의 메갈로폴리스는 런던이었다. 금융과 행정, 언론과 대학, 대기업 본사가 집중되면서 산업문명의 규범과 방향을 결정하는 도시 시스템으로 작동했다.
그리고 이 세 도시 유형이 결합한 전체 구조를 멈포드는 하나의 산업슬롯 도시 시스템으로 이해했다. 즉 산업슬롯 도시 시스템은 컨트리하우스의 소비문화, 코크타운의 생산 체계, 메갈로폴리스의 통제 기능이 결합된 구조였다.
산업도시는 산업슬롯 시스템의 생산 기지로서 도시 자체보다 생산 효율과 물류 체계 중심으로 건설됐다. 공장은 철도와 항만 주변에 배치되었고, 주거와 생산, 상업 기능은 철저히 분리되었다.
이러한 산업도시는 효율적이었지만 도시 자체를 창조 생태계로 만들지는 못했다. 도시의 역할은 노동력 공급과 관리 기능에 가까웠다. 실제로 영국의 공업도시, 독일의 제조업 지대, 미국의 대기업 중심 산업도시 체계는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창조도시와는 거리가 멀었다.
산업슬롯의 예외: 보헤미아(Bohemia)와 장인도시(Artisan City)
하지만 산업슬롯 내부에도 예외적 흐름은 존재했다. 대표적인 것이 보헤미아(Bohemia)와 장인도시(Artisan City)였다.
보헤미아는 산업슬롯의 기능주의 질서 바깥에서 등장한 문화적 예외 공간이었다. 19세기 이후 예술가와 작가, 장인과 지식인들은 산업도시의 획일적 질서에서 벗어나 독특한 도시 공동체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뉴욕의 그리니치 빌리지(Greenwich Village), 런던의 소호(Soho), 파리의 생제르맹데프레(Saint-Germain-des-Prés) 같은 지역들이 대표적 사례였다.
이 지역들은 산업슬롯 주류 질서의 중심은 아니었지만, 창조성과 예술, 실험적 라이프스타일이 결합된 도시 공간이었다. 생산과 생활, 문화와 인간관계가 다시 결합된 도시적 예외 공간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산업슬롯 내부에는 생산 방식 자체가 다른 도시들도 존재했다. 대표적 사례가 스위스의 라쇼드퐁(La Chaux-de-Fonds)이다. 라쇼드퐁은 세계 시계산업의 중심지였지만 일반적인 산업도시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발전했다. 시계산업은 거대한 공장 하나로 운영되지 않았다. 스프링, 기어, 보석 세공, 인그레이빙 등 수백 개의 공정을 전문 장인과 소규모 공방들이 분산적으로 담당했다.
스위스 시계산업의 에타블리사주(établissage) 시스템은 도시형 분산 생산 네트워크였다. 그래서 공방과 주택, 상점과 작업장이 함께 존재했고, 장인들은 골목 안에서 살고 일했다. 도시의 건축과 거리 구조 자체가 산업 시스템으로 작동했다. 이러한 도시를 산업도시와 구별되는 장인도시라고 부를 수 있다.
이 흐름은 이후 이탈리아 장인지구 연구로 이어진다. 지오바니 베카티니(Giovanni Becattini)는 에밀리아로마냐(Emilia-Romagna)와 토스카나 지역의 장인지구를 연구하며 소규모 기업 네트워크, 장인 문화, 지역 공동체가 결합된 경제 시스템을 설명했다. 그의 장인지구론은 단순한 클러스터 이론이 아니라 지역 문화와 생활 공동체 자체를 경제 경쟁력의 핵심으로 이해한 이론이었다.
창조도시(Creative City): 문화도시와 장인도시의 분화
1990년대 이후 등장한 창조도시 개념은 이러한 보헤미아와 장인도시의 흐름을 계승한 문화도시론이다. 그러나 창조도시에는 서로 다른 두 흐름이 존재한다.
첫 번째 흐름은 문화도시(Cultural City) 모델이었다. 찰스 랜드리(Charles Landry)는 창조도시(The Creative City)에서 문화와 창의성을 도시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설명한다. 이어 리처드 플로리다(Richard Florida)는 창조계급의 부상(The Rise of the Creative Class)을 통해 창조계급과 도시 경쟁력의 관계를 강조한다.
이 흐름은 다양성과 문화, 라이프스타일과 소비 환경, 거리 분위기와 개방성을 중요하게 보았다. 산업도시 이후 도시 경쟁력이 더 이상 공장과 물류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두 번째 흐름은 장인도시 기반의 창조도시 모델이다. 마사유키 사사키(Masayuki Sasaki)는 교토와 가나자와 같은 도시들을 연구하며 창조도시의 핵심은 단순 문화 소비가 아니라 지역 산업, 장인 문화, 역사 경관, 생활 문화의 통합에 있다고 본다.
일본의 창조도시론은 생산과 생활, 장인 문화와 도시 환경이 결합된 도시를 창조도시로 이해한다. 실제로 일본(Japan) 도시들은 저층 혼합용도 도시 구조와 골목 기반 상권, 생활권 제조업과 장인 문화를 상당 부분 유지한 채 현대화에 성공했다.
크리에이터 타운(Creator Town): 도시재생 이후의 새로운 도시 지역
2000년대 이후에는 또 다른 흐름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산업도시 쇠퇴 이후 도시재생 과정을 통해 형성된 새로운 도시 지역들이다. 이러한 지역들을 ‘크리에이터 타운’이라고 부를 수 있다.
크리에이터 타운은 과거 산업시설이나 노후 주거지, 저층 골목 지역 위에서 형성된다. 예술가와 디자이너, 창작자와 독립 자영업자들이 유입되며 새로운 도시 문화를 만들어낸다.
리처드 로이드(Richard Lloyd)는 네오헤미아(Neo-Bohemia)에서 시카고의 위커파크(Wicker Park)를 사례로 이러한 현상을 ‘네오 보헤미아’라고 설명했다. 보헤미아 문화가 후기 산업슬롯 도시재생과 결합한 것이다.
서울의 골목상권 현상 역시 이 흐름과 연결된다. 성수동, 연남동, 망원동, 해방촌 같은 지역들은 단순 상권이 아니라 창작자와 독립 브랜드, 로컬 문화가 결합된 크리에이터 타운에 가깝다.
흥미로운 점은 이러한 크리에이터 타운이 다시 중세도시와 장인도시의 특성을 회복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생산과 생활, 문화와 상업, 인간관계와 장소성이 다시 결합되기 시작한 것이다.
AI 시대, 다시 도시를 묻다
오늘날 AI 시대에 다시 도시가 중요해지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산업도시는 생산 효율을 위해 도시를 기능별로 분리했다. 그러나 창조도시와 크리에이터 타운은 창조성과 협업, 관계와 분위기를 필요로 한다. 사람들은 다시 골목과 생활권, 저층 도시, 지역 공동체를 찾기 시작했다.
산업슬롯 도시 시스템은 생산 효율을 위해 도시를 기능별로 분리했다. 그러나 AI 시대의 창조경제는 다시 관계와 분위기, 생활권과 협업, 장소성과 공동체를 요구하고 있다.
어쩌면 미래 도시는 완전히 새로운 도시가 아닐지도 모른다. 산업슬롯가 주변부로 밀어냈던 보헤미아와 장인도시의 원리가 다시 도시의 중심 질서로 돌아오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