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고사는 일에 가려 보이지 않던 세상
어른이 되고도 한참 동안 나는 비행기 티켓 한 장 쥐어보지 못했다.
형편은 늘 제자리걸음이었고, 매일 생존을 위해 살아내기 바빴었다.
해외여행은 커녕 당장 한달 한달 어떻게 살아야 할지 걱정하던 내게 '여권'이라는 단어도 사치스러웠다.
그러던 어느 날, 함께 일하던 대표님이 툭 던진 한마디가 정지해 있던 내 세계에 파동을 일으켰다.
"여권은 있나?" 없다는 내 대답에 그는 하나 만들어두라고 권했다.
나갈 일도 없는데 무얼 하러 만드냐며 손사래를 쳤지만, "만들어두면 일이 생길지 누가 아느냐"는 그 막연한 희망에 등 떠밀리듯 마포구청으로 향했다.
2010년의 어느 날이었다.
마법같은 일은 한 달 뒤에 시작 됐다.
생전 처음 비행기에 몸을 실은 것도 모자라, 직원 20명을 이끄는 인솔자라는 막중한 임무까지 맡게 된 것이다.
나조차 모든 게 처음이었지만, 여권이라는 통행증이 손에 쥐어지자 세상은 기다렸다는 듯 길을 내주었다.
다들 호텔안에서 쉬고 있을 때 잠시 짬이 나서 해변가에 누워 좋아하는 사람과 같이 오면 정말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뒤로 기억을 떠올려보니 10개국은 다녀왔다.
사이판은 대여섯번 갔는데, 첫 해외 골프를 친 곳이 사이판이었다.
2018년, 회사를 그만두고 잠깐 쉴 때 떠난 한 달간의 여정이 마지막이 될 줄 알았을까.
2020년, 여권은 조용히 만료되었다.
텅 빈 여권 칸을 다시 채우려 재발급 신청을 했다.
딱히 당장 떠날 계획이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오래 전 그때처럼, 다시 서랍 속에 여권을 넣어두니 묘한 기대감이 차오른다.
여권이 생기면 갈 수 있는 기회도 운명처럼 따라붙는 걸까.
바카라상 위에 놓인 새 여권을 보며, 나는 다시 한번 쓸데없는, 그러나 기분 좋은 상상을 시작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