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는 이름, 이메일 주소, 휴대폰 번호, 직급만 제출하면 명함이 만들어진다. 색도, 폰트도, 종이 질감도 내가 정할 수 없다. 그래도 첫 온라인 게임에서 내 이름이 찍힌 명함을 처음 받았을 땐 정말 가슴이 두근거렸다.
‘콘텐츠팀 작가’라는 글자를 한참 바라보며, 마치 세상에 공식 등록된 어른이 된 것 같았다. 그런데 그 설렘도 잠시였다. 어느새 명함은 외부 미팅 때 챙겨야 하는 ‘준비물’이 됐다. 주고받을 때 예의 바르게 두 손으로 내밀고, 이번 미팅에는 몇 장 정도 필요할지 계산하고. 그게 다였다. 명함을 찬찬히 들여다보거나 내 이름을 다시 읽어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퇴사 후에는 명함이 아예 없었다. 슬프게도, 나를 찾아주는 사람이 없어서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나조차 정의하지 못했다. 회사에 있을 땐 ‘작가’나 ‘프로듀서’ 같은 타이틀이 자동으로 붙었지만, 회사 밖에서는 그 모든 게 사라졌다. 남은 건 이름과 전화번호뿐이었다. 명함을 만들고 싶어도 뭐라고 적어야 할지 막막했다. 사업체가 있는 것도 아니고, 프리랜서라고 적기엔 너무 밋밋했다.
생각해 보면, 그건 단순히 직함이 없어서가 아니었다. 내가 어떤 일을 중심으로 살아갈지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좋은 작품이 있으면 프로듀서로, 시나리오 요청이 들어오면 작가로, 강의 제안이 오면 강사로 변신했다. 마음은 바쁘고 의지는 넘쳤지만, 정작 한 가지를 골라 집중하려니 머리가 복잡해졌다.
특히 대학교 졸업 이후 10년 넘게 한길만 걸어온 친구들을 볼 때면 괜히 초라해졌다. 그들의 명함은 명확했으니까. 그 한 줄로 그들의 존재가 설명됐다. 반면 나는 뭐 하나 제대로 할 줄 모르는 사람 같았다.
남들은 다 전문가 같고, 나는 여전히 방향을 못 정한 백수 느낌이랄까.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에밀리 와프닉의 『모든 것이 되는 법』이라는 바카라을 읽게 됐다. 바카라에는 이런 문장이 있었다.
“세상은 우리에게 한눈팔지 말고, 오직 한 우물만 파라고 가르친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애초에 하나만 선택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그 문장을 읽는 순간, 이상하게 숨이 트였다. 그래, 나는 그 ‘하나만 못 고르는 사람’이구나. 바카라에서는 그런 사람을 ‘다능인(Multipotentialite, 멀티포텐셜라이트)’이라 불렀다. 하나의 길로는 만족할 수 없는 사람, 여러 일을 연결해서 자기만의 일을 만들어가는 사람. 그 단어를 읽는 순간,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나는 하나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아니라, 다양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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